Bible College :: 제22호 그리스도인이 기도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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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하나님의 뜻대로 배우려 함
Jangjaedang

성경으로 돌아가는 길잡이 제22호 그리스도인이 기도하는 이유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

1. 기도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천연계와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항상 말씀하고 계신다. 또한 성경은 성령께서 항상 우리의 마음 속에 역사하고 계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제에 있어서 그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우리도 하나님께 말하는 일이 필요하다. 관계란 항상 서로 간에 의사 소통과 대화가 있어야 이루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심정을 하나님 앞에 토로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영적 생명과 힘을 얻기 위하여 우리 하늘 아버지와의 실제적인 교제를 가져야 한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사모하기도 하고 또한 그의 업적과 그의 자비와 그의 축복에 대하여 명상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려면 우리의 실제적인 매일의 생활에 대하여 하나님께 무엇인가 말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기도는 마치 친구에게 대화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우리의 심정을 펼쳐놓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형편을 하나님께 알리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형편과 마음을 우리 자신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기도의 목적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우리 생활 속에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우리에게로 내려오시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올라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더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대화하는 일이 기도이다.

이러한 생각은 기도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 커다란 혁명을 일으켜 줄 수가 있다. 기도란 우리의 뜻을 관철하기 위하여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이 하나님께 매어 달리거나 졸라대는 식의 호소가 아니다. 기도는 우리의 원하는 것을 받아낼 때까지 하나님의 팔을 비틀어대는 식으로 붙들고 늘어지는 어거지도 아니다. 기도는 오히려 우리가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그분의 뜻을 수용할 수 있게 되기 위하여 주님과 나누는 대화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도 훨씬 더, 우리를 향한 최선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점이 바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할지를 가르쳐 주셨다. 주님께서는 저희의 매일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고 저희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 버리라고 하셨다. 그러면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예수님 자신도 이 땅에 거하실 때에 자주 기도하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의무와 시련을 위하여 굳세게 나아갈 수 있도록 당신의 아버지께 새로운 능력을 달라고 늘 기도하셨다. 예수께서 이른 아침에 기도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셨다는 기사를 우리는 성경에서 자주 읽게 된다. 예수는 모든 일에 우리의 모본이 되신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이 연약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셨다(히 4:15절 참조).

그분도 죄악 세상에서 마음 속의 많은 투쟁과 고민을 경험하셨다. 그분도 인간으로 오셔서 사셨기에 절실하게 기도가 필요하셨다. 예수께 있어서 기도는 하나의 큰 특권이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와 교통하는 기도의 경험에서 큰 위안과 기쁨을 발견하셨다. 인류의 구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도 기도의 필요를 느끼셨는데, 하물며 이렇게 연약하고 죄가 많으며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이야 어떠하겠는가!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풍성한 축복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려고 항상 기다리고 계신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샘에서 마음껏 퍼마시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우리가 기도를 그렇듯 적게 하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 중에 아무리 비천한 사람일지라도 진정으로 하는 기도를 듣기 원하시고 고대하시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자기의 소원을 하나님께 기도로 말씀드리기를 싫어하는 것처럼 기도를 게을리 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사랑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그리워 하시고 저희가 구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들이 이렇게 기도를 적게 하고 있으니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있는 하늘의 천사들은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천사들이 아무리 우리를 도와 주고 싶어도 구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도와줄 수가 없어서 안타까워 하고 있을 것이다. 천사들은 하나님 앞에 경배하기를 좋아하며 그분 앞에 가까이 있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일을 저들의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는 일 없이 그저 하루 하루를 살아 가고 있다.

마귀는 기도를 게을리하는 자들을 어두움으로 가두어 놓는다. 이 원수의 속삭이는 시험은 저들을 쉽게 죄에 빠뜨리고 유혹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도의 특권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쌓아 둔 하늘 창고를 여는 믿는 자의 손에 있는 열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어쩌면 이렇게 기도하기를 싫어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기도하고 늘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는 부주의하게 되고 정로에서 탈선하게 되는 것이다. 사단은 우리가 열성 있는 기도를 통하여 얻게 되는 시험을 이기는 은혜와 능력을 얻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으려고 끊임없이 애쓰고 있다.


2. 응답받는 기도의 조건

기도에 대한 또 다른 중요한 면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기를 기대하려면 거기에 몇 가지 조건들이 있다.

첫 번째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를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리라" (사44:3)고 말씀하셨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같이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들은 확실히 배부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마7:7)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두 번째는,

회개하는 심정으로 주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마음에 죄를 품든지, 알고 지은 죄를 버리지 아니할 것 같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고 통회하는 자의 기도는 언제든지 받으실 것이다. 모든 아는 죄를 바로잡은 후에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것을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의 공로이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그분의 보혈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께서 받으시는 조건을 응하기 위하여 우리 편에서도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응답 받는 기도의 또 하나의 요소는 믿음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히11:6) 한다.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11:24)고 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은 광범위하고 무한하며 약속을 허락하신 분은 진실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구하는 그것을 꼭 우리가 구하는 바로 그 시간과 그러한 방법대로 받지는 못 할지라도 우리는 주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흠이 많고 장래 일을 잘 내다보지 못함으로 어떤 때에는 우리 자신들에게 축복이 되지 못하는 것들을 구하기 일쑤이다. 그러므로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써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방법대로, 다시 말해서 만일 우리가 영적으로 눈이 밝아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만 있다면 우리 자신도 그렇게 원하며 구하게 될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듯한 때라도 우리는 그 허락을 굳게 붙잡아야 할 것이다. 응답의 시간은 확실히 올 것이며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언제나 우리가 꼭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되고 또한 우리가 꼭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지혜로우시므로 잘못하실 리가 없으시며, 지극히 선하시기 때문에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반드시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기도가 즉시 응답되지 않을지라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그의 확실한 허락을 믿어야 한다.

네 번째는,

우리가 하나님께 긍휼과 축복을 구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우리 마음 가운데 사랑과 용서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라고 기도하면서 어떻게 용서하지 않을 마음을 품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기를 바랄진대 우리는 우리가 용서함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용서해 주어야 할 것이다.

다섯 번째는,

기도를 꾸준히 하는 일은 응답을 받는 조건이 된다. 우리의 믿음과 경험이 자라나기를 원할진대 우리는 항상 기도하여야 한다. 우리는 깨어서 항상 기도하며, 감사함으로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한다.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벧전4:7)고 권하였다. 바울은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4:6)고 가르쳤다. 유다는 “사랑하는 자들아…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 (유 20,21)라고 말씀하였다. 끊임없는 기도는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과 끊임없이 연결됨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와서 우리의 생명으로 들어오고 다시 순결과 거룩함이 우리의 생명에서 하나님께로 흘러 돌아가게 한다.

기도에 있어서는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무슨 일이든지 간에 우리의 기도하는 일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 예수와 우리들의 심령 사이에 교통함이 막히지 않도록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한다. 기도할 때에 우리가 늘 습관적으로 하는 곳으로 가서 기도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참으로 원하는 자들은 기도회에 참석하기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가정 안에서 기도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은밀한 기도를 등한히 하여서는 안된다. 기도를 등한히 하면서 영혼이 번영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족 기도와 공중 기도만으로는 넉넉지 않다. 홀로 조용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 앞에 우리의 심령을 내어놓는 일이 중요하다. 비록 우리의 주위가 부패된 분위기로 둘려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 더러운 공기를 호흡하지 않고 하늘의 깨끗한 공기 가운데서 살 수 있다. 우리는 진정한 기도로써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올림으로 불순한 망상이나 불경한 생각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모든 문을 막을 수가 있다. 하나님의 붙들어 주심과 그분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마음 문을 열어 놓는 자들은 이 땅의 분위기보다 더 거룩한 분위기 가운데서 살 수 있게 될 것이며 하늘과 끝없는 교통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마음은 찬송의 날개를 타고서 하늘로 더욱 가까이 오를 수가 있다. 찬송은 곡조에 담은 다른 형식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우리의 단순한 권리가 아니라 우리의 특권이다. 우리는 더 많이 기도하여야 한다.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우리는 더욱 더 많이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기도는 성경적인 기도가 되어야 한다. 극단적이고 광신적인, 그리고 지극히 이기적이며 무엇을 얻어 내기 위해 보채는 형식의 기도는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그러한 기도는 사실상 자기 도취이지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과의 대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도는 우리의 권한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다.

3. 기도하는 이유

우리는 왜 기도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신다. 우리가 일일이 고하지 않아도 그분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 자녀는 먹을 것과 입을 것, 잠자리를 달라고 아버지께 조르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공급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심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그분께 우리의 필요를 아뢰어야만 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가? 아버지께서 채워주실 것을 다 알면서도 무릎 꿇고 비는 것은 우리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 아닌가?

그에 대한 답은, 사람들이 기도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며 또한 그분은 사람들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에게 똑같이 비를 내리신다. 마5:45. 아무도 무언가를 위해 빌어야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편애함 없이 모두의 필요를 채우신다. 사실, 많은 경우 악한 사람들이 의로운 사람들보다 더 잘 산다.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우를 허락하심이 틀림없다. 만일 그분께서 의로운 자들에게만 복을 주시고, 악한 자들은 가난으로 저주하신다면, 어떤 이들은 단지 잘 살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이킬 것이다. 그렇다면 복은 단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도록 매수하는 뇌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맞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이생에서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상에 대한 욕심 없이 선과 악 둘 중에 하나를 택하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치우침 없이 대하시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미워하는데도 경제적으로 부요하다. 한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중에는 간신히 생계를 이어나가는 이들도 있다. 전자는 근면하게 일하고, 그들에게 있는 것을 잘 간수하며 하는 모든 일에 부지런하다. 후자는 부주의하고 나태하며 기도는 많이 하고 일은 거의 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고 느낀다. 하나님께서 자기 편에 계시고 또한 도와주실 것이니 철저하게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 그리스도인 의사보다 열심히 준비한 믿지 않는 외과 의사가 더 좋은 기술을 갖고 성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기도해야 하는가? 만일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특별한 도움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면, 기도하지 않는 사람과 똑같이 열심히 연구하고 일해야 한다면, 도대체 왜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하는 농부가 믿지 않는 그의 이웃만큼이나 열심히 밭에서 일해야 한다면, 기도해서 더 좋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무신론자인 친구보다 더 나은 외과 의사가 될 수 없다면 왜 의대생은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가?

고백에 대한 삐뚤어진 인식
이 모든 질문들은 전부 기도란 것은 일하지 않고도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낼 수 있는 방편이라는 전제를 기초로 한 것이다. 믿지 않는 자는 성공하기 위하여 일한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로서 일을 대신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 아니다. 기도는 행함이나 일, 혹은 다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다. 기도하고 회개함으로 용서받을 수는 있지만, 악한 행동의 결과를 바꾸거나 그에 따르는 형벌을 없이 할 수는 없다. 다윗은 그의 죄를 자백하고 깊이 회개하였지만, 그가 지은 죄의 결과들은 없어지지 않았다(삼하12:13~14). 이것이 바로 사람은 망각하기 쉽고 그러므로 항상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어떤 학교에서 학생들 중 한 명이 중요한 시험에서 부정 행위를 하였다. 그는 평균 정도 되는 학생이었는데 부정행위를 한 결과 시험 성적이 잘 나와서 B학점을 받았다. 얼마 후 그의 양심은 그를 괴롭혔고 그는 자신의 부정 행위를 깊이 뉘우치며 선생님께 그것을 고백하는 편지를 썼다. 선생님은 그가 고백해서 기쁘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 학생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그의 점수를 B에서 F로 고쳤다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그 학생은 선생님이 한 일에 대해 분노를 표시하면서 말하기를 만약 자백한 것의 결과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결코 자신의 잘못을 얘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자백은 B학점을 얻을 만하지 았았던가? 그 학생은 그가 스스로의 힘으로 치르지 않은 시험에 왜 선생님이 B학점을 줄 수 없는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자백한다는 것으로 그의 부정 행위를 고칠 수는 없으며 B학점이 요구한 공부를 대신할 수도 없다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그 학생의 자백의 결과로 그에게 B학점을 준다면 부정 행위를 한 다른 학생들에게도 똑같이 해야 될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정직하게 학점을 받은 모든 학생들에게 불공평한 일이 될 것이다. 상을 얻으려고 하는 자백은 진정한 자백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죄를 자백하면 형벌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심으로 사람을 매수하지 않으신다. 순종하는 자에게 상이 허락된 것은 사실이나, 무엇인가를 얻어내기 위해 하는 순종이나 자백은 거의 가치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사실 그런 순종은 아무런 도덕적 가치가 없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까불지 않으면 사탕을 주겠다는 약속 때문에 얌전하게 순종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욥의 경우에 바로 이 원칙이 걸려있었다. 사단은 조소하듯이 "욥이 아무 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십니까?" 라고 물었다. 사단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고 욥이 경건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하게 해주셨기 때문이라고 넌지시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를 울로 두르셔서 어떤 악도 그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고, 그분께서 그 손의 일을 축복하셔서 그의 재물을 늘리셨기 때문에 욥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사단은 이야기하였다. 욥1:10.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1:11.

하나님은 사단의 불평을 받아들이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고 하셨다. 이 시험을 허락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재물을 바라고 하는 것이라는 사단의 고소를 꺾고자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기적인 동기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 하나님께서 축복을 거두어 가신다고 해도 하나님을 믿는 자가 이 세상에 있음을 보이고자 하셨다. 비록 욥은 그의 결정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에 있어서 욥에게 의지하고 계셨던 것이다.

욥의 재물을 뺏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사단은 욥이 가진 모든 것, 심지어는 그의 자녀들까지도 모두 빼앗았다. 그는 완벽한 일을 해냈다. 종들은 달려와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재앙들을 보고하였다. 갑작스런 재앙에 할 말을 잃은 욥은 나직이 아뢰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1:21, 22.

사단은 하나님께서 욥이 가진 것을 제하신다면 욥이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 욥은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완승이었다. 왜냐하면 사단이 이 시험의 조건들을 내세웠고 하나님께서 그것에 동의하셨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이 지구상에서 한 사람만큼은 이익을 얻고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사단은 패배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다시 돌아와 말하기를 그가 진 것은 하나님께서 욥의 몸에 손대지 못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단으로 하여금 "그의 뼈와 살을 치도록" 하신다면 욥이 대면하여 욕할 것이라고 하였다. 욥2:5 참조. 하나님께서는 이 시험의 법칙을 바꾸는데 동의하시고,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2:7. 여전히 욥은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시험을 그에게 허락하셨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부인은 그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지만 욥은 요동하지 않았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결과는 첫 번째 시험과 똑같았다.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2:10.

시험은 끝났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주장과 고소가 허위였음을 증명하셨다. 욥은 이익을 얻고자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었다. 욥은 다음과 같은 승리의 말로 그의 믿음을 표현하였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 욥13:15(KJV).

왜 기도하는가?
왜 기도하는가, 라는 질문이 생기는 이유는, 사람들이 기도할 때에는 거기에 따르는 이점이 있으며 만약 그러한 유익이 없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이러한 생각은 기도를 상업적으로 사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기도의 본질을 무시하는 것이다.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과 교통하고 친구에게 하듯 그분과 대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친구들과 어울리고 이야기를 나누는가? 우리 자신을 부요하게 하기 위해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얻으려고 함인가? 이러한 것을 생각하는 자체가 진정한 우정과 친교에 정반대되는 것이다. 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어울리고 함께 앉아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가? 그들이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답이 아닌가?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자신의 손익을 따지는 것은 그들의 목적과 멀다. 참으로 그러한 동기는 진정한 사랑에 치명적일 것이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닌, 주는 것에 기초한 것이다.

왜 기도하는가? 왜 사랑하는가? 마찬가지로, 왜 숨쉬는가? 라고 물을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다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들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교제가 있고, 기도가 있다. 다른 어떤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왜 기도하냐고 묻는 것은 이상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기도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기도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어린 아이에게 왜 기쁘거나 슬플 때 엄마에게 달려가서 이야기하는지, 또 자기가 발견한 것을 엄마에게 보여주는지 묻는다면 그 아이는 틀림없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가 하고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엄마 외에 누구에게로 아이가 달려가겠는가? 그 이상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엄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엄마는 아이의 지혜의 샘이다. 엄마는 상처들을 아물게 하고 눈물을 마르게 할 수 있다. 그녀는 어떤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다 알고 있다. 그녀는 이해한다. 때때로 아이는 단지 엄마를 사랑한다고 말하기 위해 엄마에게 달려간다. 볼을 쓰다듬어 주고, 뽀뽀해 주고, "엄마도 너를 사랑해"라고 말할 때, 이 모든 것이 왜 아이가 엄마에게 달려가는지를 설명해 준다. 아이에게는 왜 엄마에게 달려가는지 묻는 것이 유치하고 이상한 것이다. 그 아이는 아마도 어른들은 뭘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가 옳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그가 왜 기도하는지 묻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구하고 그것을 받지만, 믿지 않는 그의 이웃 역시 기도하지 않고도 양식을 받는 것을 안다. 그는 하나님께서 까마귀와 참새와 악한 자들을 모두 먹이신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 왜 기도하는가? 왜냐하면 믿지 않는 사람이 받는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조건에 응낙하기를 원하지 않음으로 못 받는 것을 그리스도인은 양식과 더불어 받기 때문이다.

아이가 자라나면서, 아버지는 그의 자녀가 음식과 옷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할 것임을 안다. 그는 교제와 친교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는 이해심 많은 아버지의 조언을 필요로 할 것이다. 아들은 스스로에게 그러한 도움이 얼마나 필요 되는지 모를 수도 있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알며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 기꺼이 그의 최선을 다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육신을 위하여 모든 이들에게 양식을 주신다. 또한 원하는 자들에게 정신과 영혼을 위한 양식을 주신다. 그분은 모든 이들에게 이것을 제공하시지만, 많은 이들이 육신의 양식은 받아들이면서 영혼의 양식은 거절하여 영원히 잃어버림을 당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 이것을 제공하신다. 그분은 모두에게 그 손을 펼치시지만 오직 소수만이 하나님의 손을 잡는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 인간이 그분께서 제공하신 것을 거절하는 것은 그분의 마음을 너무나 슬프게 한다.

왜 기도하는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인가 얻어내기 위함이 아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친구를 사귀는 우정이야말로 만인의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 우정은 절대로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왜 기도하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무아적인 사랑에 기초한 우정보다 더 거룩한 것은 없다. 그것은 이 땅에 존재하는 하늘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심장에 넣어주신 사랑과 동정으로 충만할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친교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우정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15:14, 15.

"너희는 나의 친구라." 이것보다 더 영광스럽고 놀라운 일이 있는가? 친구를 갖는 것 - 당신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을 열 때 이해할 수 있는 사람, 당신의 확신을 견고한 신뢰로써 누설하지 않는 사람, 당신이 갖고 있는 가장 거룩한 소망과 야심을 이야기할 때 마음속으로 비웃거나 업신여기지 않는 사람, 그 마음이 당신의 사랑과 연결되어 있고 당신의 감정에 반응하는 사람, 비록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당신을 끝까지 믿어주는 사람, 다른 이들이 오해할 때 당신을 변호해 주고, 온 세상이 등을 돌려버릴 때 당신 곁에 서 있는 사람, 그 자리에 없거나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라도 한결같은 사람, 당신의 약점을 알고도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 슬플 때나 도움이 필요할 때 당신 곁에 있기 위해 대륙을 횡단할 사람, 절대로 당신을 버리거나 떠나지 않을 사람 - 이것이야말로 궁극적인 우정인 것이다!

만일 당신에게 그런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를 꼭 잡으라. 폭풍이나 태풍, 비바람, 눈보라, 물불이 닥쳐와도 그와 헤어지지 말라. 살든지, 죽든지 그에게 매달리라. 그와 대화하라. 그와 교통하라. 그를 사랑하라. 이러한 친구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결코 그를 저버리지 말라. 그는 절대로 당신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친교
기도는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것, 혹은 그분께 말하는 것, 그 이상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친교요, 생명이다. 우정이나 친교에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은 말하는 데 있지 않고, 말을 뛰어넘어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데 있다. 진정한 친구는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귀중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두 사람은 조용하게 바닷가에 앉아 손을 잡고 침묵 속에 달콤한 교제를 즐길 수 있다. 두 사람은 숲속을 걸으며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연과,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와 교제를 나눌 수 있다.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 헌신하며 하나님과 서로에게 자신들을 바칠 때에, 완전한 이해가 영혼에 깃들 것이다. 겉으로 드러남 없이 마음과 영혼의 교통이 있을 수 있다. 비록 입으로 하는 말은 없을지라도, 사랑, 우정, 동의, 그리고 조용한 기쁨과 넘치는 행복이 있다.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다음의 이야기의 뜻을 이해할 것이다. 평생을 함께 한 친구 둘이 인생의 황혼이 가까워올 때, 어느 조용한 오후 둘이 함께 말 한 마디 없이 앉아있다가 저녁이 되면 한 사람이 둘 모두의 감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오늘 오후 우리 함께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구나." 이러한 우정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결코 "왜 기도해야 합니까" 라고 묻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지금 이곳에서 맛볼 수 있다. 천국은 단지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바로 천국이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쉬고 함께 교통하는 것이 천국을 지금 이곳에서 맛보는 것이다. 성경절 중에 스바냐 3장 17절보다 더 아름답게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해 놓은 곳은 없을 것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 구절을 읽으면 어머니가 그녀의 어린 것을 품에 안고 기쁨에 겨워 노래하며 사랑으로 편히 있을 때 아이가 엄마에게 바짝 다가붙는 평화로운 그림을 떠올리게 된다. 평화, 만족, 사랑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예로 든 것이다. 어머니가 품 안의 아이에게 조용히 노래 불러 주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노래 부르신다. 그분은 우리를 그 사랑 안에 쉬라고 하신다. 이것은 그 속성이 사랑이신 하나님께 평화와 만족을 드린다. 어떻게 우리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비할 데 없는 사랑으로 두르신 그분을 한번 쳐다보기만 한다면 어찌 우리가 그분과 교제를 나누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도는 교제이다. 기도는 생명이다. 기도는 사랑이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기도하지 않고 살 수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분의 사랑과 친교, 그리고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기도한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또한 다른 어떤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영혼의 만족감을 그분에게서 얻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 기도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기 위해 기도한다. 그분의 마음을 바꾸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도록 기도한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계획을 바꾸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사 그분의 계획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시도록 기도한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견딜 힘을 달라고 기도한다. 세상에서 데려가 달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신실하게 살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한다. 고생이나 시련에서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감내할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한다. 일감을 치워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잘 할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다.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 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과 성도들의 교제를 귀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기도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기도란 진정한 감동 없이 해내는 일이 되었고, 특권이라기 보다는 의무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이러한 태도는 단지 뜨뜻미지근한 그리스도인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이름있는 사람들에게도 기도는 습관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많은 경우, 이것은 사람들이 기도의 의미와 그 무한한 가능성을 희미하게 밖에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도를 말하고, 기도를 외울 뿐, 자신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토로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진수성찬을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빵 부스러기만 주울 뿐이다. 그런 사람들은 기도와 기도의 가능성에 대해 더 연구해야 한다. 기도할 때 묵상하는 법을 배우라. 친구에게 하듯이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법을 배우라. 그리하면 그들은 전에 결코 꿈꾸지 않았던 영역에 다다를 것이다.


4. 기도 -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열쇠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눅18:1. 이 비유는 예수께서 백성들에게 하신, 한 과부의 청원을 마침내 들어준 불의한 재판관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는 공의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끈질김 때문에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비유"라는 단어는 라틴어 "파라볼라"에서 오는데 이는 비교나 예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일을 상징적으로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다.

이 비유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할 때에 낙망치 아니하고 또한 너무 빨리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낙망한다는 것은 약하고 힘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희망과 믿음을 잃어버림을 상징한다. 그것은 낙심하고 포기하는 사람을 묘사하는 것이다. 낙망은 희망, 용기, 믿음, 그리고 끈질김의 반대이다.

비유에 나오는 과부는 계속하여 재판관을 찾아가 호소하였다. 그녀가 거절당했을 때 그녀는 물러나 포기하기를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호소가 정당하였고 재판관에게는 그녀의 요구를 들어줄 의무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틀림없이 그녀를 무례하게 대하고 그녀가 포기하도록 하려고 모든 것을 다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재판관은 공평하신 하나님과 비교해볼 때, "불의한" 재판관이라고 불렸다. 만일 불의한 재판관도 마침내 공의를 실행하고 청원자의 끈덕진 소원을 들어준다면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마음이 당신의 뜻과 일치할 때 요구하는 것을 당연히 귀담아 듣고 응답해 주시지 않겠는가?

때때로 그분의 응답이 느리고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응답이 지체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왜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응답이 지체되는 것인가? 하늘로 올라가는 기도의 대부분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지체될 필요가 있다.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벌써 아시고 그것을 채워주려고 열망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기도하기도 전에 우리의 필요를 예견하신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사65:24. 기도는 우리를 변화시킨다. 기도는 우리의 태도와 우리의 품성을 변화시킨다. 기도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을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된다.

만일 부모가 아이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즉시 주면 아이들의 버릇을 망치게 된다. 그러한 아이들은 욕심 많고, 이기적이며, 자기 밖에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게 된다. 그들은 현재 살고 있는 세상과 앞으로 살 하늘 나라를 모두 잃고 만다. 잘 자란 어린이들, 훗날 유용하고 이타적으로 성장한 아이들은 종종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했거나 혹은 요구 사항들이 지체됨으로 그들의 품성이 계발되었다. 여러 해 동안의 자아 부인과 경험의 학교에서 배운 원칙을 통하여 그들은 이타적이 되고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위대한 사람들은 고생의 학교에서 만들어진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들을 가르치시는데 이 땅의 부모들보다 덜 지혜로우시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끈질긴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끝내셨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18:8. 기도의 응답이 더디므로 때때로 믿음은 흔들림을 당한다. 마지막 때에는 믿음이 희귀할 것이다. 예수님의 질문은 요한계시록 14장 12절에 그 답이 나왔는데, 바로 우리 주께서 다시 이 땅에 돌아오실 때 "예수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 그분을 맞을 것이다.

"예수의 믿음" 혹은 예수께서 가지셨던 것과 동일한 믿음은 그분께서 믿음을 얻으셨던 것과 똑같은 방법-기도와 금식-으로 얻을 수 있다. 마17:19~21. 오직 기도하는 사람들만이 믿음이 자라날 것이며, 예수님처럼 기도의 생활을 하는 사람만이 그분께서 가지셨던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백성들만이 그분께서 이 땅에 돌아오실 때 그분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을 것이다. 끈질기게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이 세상을 영광으로 밝힐 기별을 선포할 것이다.

현대 교회의 가장 큰 필요는 영적 부흥이며 이것은 오로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써 이르러 올 것이다. 오순절 이래로 있었던 모든 부흥은 모두 그들의 소원을 끈질기게 하나님께 아뢴 소수의 성도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유쾌하게 하는 성령의 이른비는 소수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기도하였을 때 내렸다. 교회 안에 대대적인 개혁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의로운 한 사람의 기도가 하나님의 팔을 움직일 수 있다. 이 세상을 뒤흔들었던 종교개혁의 능력은 기도의 밀실에서부터 나왔다. 마찬가지로 종교개혁을 완성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믿음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는 능력은 기도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이 죄 많고 반역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이다. 기도는 영혼에게 영적인 생명의 호흡이 된다.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기도는 육신의 생명과 호흡의 관계와 같다. 기도를 게을리하는 것은 영적인 죽음을 초래한다.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대화요, 교제이다. 기도는 사람을 하나님께, 이 땅을 하늘에 매어놓는 황금 줄이다. 기도는 세상을 움직이는 팔을 움직이는 능력이다. 기도는 겉으로 보아 가장 희망 없는 사람들을 바꿀 수 있다. 기도할 때 미래는 하나님의 약속들만큼이나 환하게 밝아온다.

어떤 이는 말하였다. "기도는 황금 강이다. 어떤 사람들은 강가에서 목마름으로 죽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황금 물을 마신다."

5. 하나님께서 어떤 기도들은 응답해 주실 수 없는 이유

크리스챤 저자이자 강사인 조이스 랜돌프는 목사의 부인이었던 자신의 어머니에 관한 한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여인은 기도할 때 구체적인 필요들을 하나님께 아뢰었다. 그러나 종종 그런 기도들은 응답 받지 못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번은 그녀가 우표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그녀의 기도를 들으시고 바로 그 날, 우표를 보내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우표를 받지 못했다. 그녀의 남편과 함께 일하던 원로 목사는 그 날 우표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를 위한 우표는 없었다. 후에 이 여인은 알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이 원로 목사의 마음에 우표를 그녀에게 나눠주라는 부담을 주셨었다. 하지만 그 목사가 마음을 굳게 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축복을 그녀와 함께 나누기를 거절한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많은 일들에 새로운 빛을 던져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믿음을 가지고 열렬히 기도할 수 있겠지만, 만일 그 기도의 응답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 사용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에 달려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기도는 응답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전에 우리가 생각해 왔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보통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하시는 방법은 언제나 세 가지 - 곧 응답해 주시는 것과, 나의 더 나은 유익을 위해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과, 기다림이 필요한 응답 - 중 하나라고 믿어져 왔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 네번째 가능성 - 기도 응답 받는데 쓰여질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거절하는 것 - 이 더해질 수 있는 것을 독자는 알게 되었다.

선을 위한 영향력과 악을 위한 영향력이 언제나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5:8. 하지만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확증하였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시91:11. 선과 악을 위한 영향력 중 어느 것이 우리의 삶에서 더 강할지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급하기를 원하시는데, 단지 육신적인 것(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 등) 뿐만이 아니라 감성적인 것(평안함과 행복감 등)에 있어서도 우리가 풍족하기를 원하신다. 사도 바울은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고 확언하였다. 때때로 우리 자신들의 선택으로 이러한 축복을 잃어버릴 때도 있지만, 종종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그럴 때도 있다. 만일 당신 주변의 사람들의 선택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고자 하는 것을 방해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이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함으로 이런 상황을 풀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특별히 그 사람들의 이기적인 행동이 당신과 가족들의 안전과 삶을 위협한다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 그들의 삶에 있어서 선을 위한 영향력이 악을 위한 영향력보다 더 크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또한 야고보서 5장 16절에 있는 약속을 주장할 수 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물론 당신이 기도한다고 해도 그들은 여전히 선과 악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대의 삶에서 복잡한 상황들을 도와주실 것이다. 어떤 때는 기도의 응답이 딱 맞는 시간에 이르러 온다. 어떤 때는 그 응답이 오래 걸리고 이해하기 어렵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오직 힘든 경험들을 통해서만 이것을 배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교훈을 통하여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우리 마음에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 그 일이 비록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한다 할지라도 기꺼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꼭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상황에서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고 있으며 그의 기도를 응답하시기 위해 오늘 내 마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지도 모른다.

선한 음성, 양심은 하나님의 목소리다. 우리가 그것을 거절하므로 다른 이가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고 어둠 가운데 있도록 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마음에 오는 부담감을 거절하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쓰실 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동역하여 일할 기회와 축복을 잃는다는 것이다. 다른 이를 사용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나의 행복을 위해 다른 이를 도우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누군가의 기도의 응답을 위해, 그리고 내 영혼을 위해 그분의 부르심에 순종하자.


* 기도 이야기

하나님과의 대화

나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하나님 : 그래!
나 : 방해하지 마세요. 저는 지금 기도하는 중이에요.
하나님 : 하지만, 너는 방금 나를 불렀잖니?
나 : 당신을 불렀다구요? 아니오, 단지 기도하고 있을 뿐이었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하나님 : 그것 봐라. 또 나를 불렀잖니.
나 : 제가 언제요?
하나님 : 방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라고 했잖니. 그래, 무슨 말을 하고 싶니?
나 :하지만 거기엔 아무 뜻도 없었어요. 그저, 아시다시 피, 오늘을 위한 기도를 주문처럼 외우고 있을 뿐이었어요. 항상 주기도문을 외거든요. 그러면 마치 임무를 완수한 것처럼 기분이 좋아져요.
하나님 : 그래? 알겠다. 그럼, 계속 기도하렴.
나 : 그러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 : 잠깐만! 방금 무슨 뜻으로 한 말이었니?
나 : 뭘요?
하나님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했잖니.
나 : 그건, 그건, 음,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그게 무슨 뜻인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저 주기도문의 일부분일 뿐이지요.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이지요?
하나님 : 나의 이름에는 나의 모든 것이 들어있단다. 그래서 나의 이름은 나의 성품이나 마찬가지지. 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은 너의 말과 행동과 생각으로 나의 성품을 거룩하게 드러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란다.
나 : 아, 이제 이해가 가네요. 무슨 뜻인지 전에는 몰랐어요. 감사합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 : 너 정말로 그렇게 되길 원하니?
나 : 그럼요.
하나님 : 그럼, 그렇게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니?
나 : 무엇을 하냐구요? 음, 생각해 보니까 아무것도 한 것이 없네요. 제 생각에는 주님이 그 위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것처럼 이 밑에서도 모든 것을 좀 주관하셨으면 해요. 아시다시피, 여기엔 불행한 일들이 참 많아요.
하나님 : 그래, 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먼저 네 마음을 주관하게 해다오.
나 : 네? 무슨 말씀이신지...
하나님 : 네가 하는 말들, 집에서 가족들을 대하는 태도, 급한 성격, 네가 즐겨 보는 것들, 돈 쓰는 문제들을 포함한 너의 모든 것을 내가 돕게 해다오.
나 : 잠시만요! 저만 갖고 뭐라 그러지 마세요. 저도 교회에 다니는 다른 사람들만큼은 된다구요.
하나님 : 난 네가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기도한 걸 들었는데, 정말 그렇게 되려면 너의 뜻과 의지로 나만 선택하고 따라와야 한단다.
나 :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만 따라가라고요? 제가 즐기고 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을 버리지는 못 할 것 같아요. 전 그것들이 좋거든요.
하나님 :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란다. 너에게 참으로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을 선택 하라는 뜻이야. 네가 지금 즐겨 하는 것들이 너에게 참 행복을 가져다주고 있니?
나 : 참 행복이라고요? 아니요, 아니요. 해가 뜨고 나면 허무함을 느끼죠.
하나님 : 그래, 내가 다 안단다. 우리 함께 극복해 나가자꾸나. 네가 정말 자랑스럽단다.
나 : 그런데 하나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저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거죠?
하나님 : 너는 영의 양식을 먼저 구해야 한단다. 지금 네게 필요한 양식은 성경 말씀이란다. 그 성경을 펴서 너의 갈급한 영혼을 채우렴.
나 : 성경 읽는 것이 습관이 안 되서 한 번 펴기가 쉽지 않네요. 절로 한숨이 나와요.
하나님 : 어느 누구도 너에게 성경을 펴줄 수가 없고,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성경을 빼앗을 수 없단다. 하지만 이걸 기억하렴. 성경 말씀은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이라는 것과 너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지금 선택하렴. 성경을 펴기로...
(잠잠 .......)
하나님 : 기도하렴.
나 : 두려워요.
하나님 : 두렵다고? 뭐가?
나 :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지 다 알아요.
하나님 : 그러니?
나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나님 : 그 사람은 어떻게 할 거니?
나 : 주님께서 그 사람 얘기를 하실 줄 알았다니까요. 주님, 그 여자는 저에게 거짓말을 하고 저에 대한 온갖 헛소문을 퍼뜨렸어요. 또 빌려간 돈은 절대로 안 갚았다고요. 이번 기회에 꼭 버릇을 고쳐줄 거에요!
하나님 : 하지만, 너는 기도하지 않았니? 네 기도는 어떻게 되는 거니?
나 : 그럴 맘이... 없어요.
하나님 : 그래, 적어도 넌 솔직하구나. 하지만 미움, 증오, 시기는 너를 힘들게 할 뿐이란다.
나 : 그렇겠죠. 하지만 그 여자에게 복수하고 나면 괜찮아질 거에요. 계획을 다 짜 놨다구요. 내가 아팠던 만큼 아프게 해줄 거에요!
하나님 : 아니야, 그렇게 한다고 해서 네 기분이 더 나아지지는 안을거야. 복수는 너의 마음을 결코 위로하지 못한단다. 너 스스로 지금 얼마나 불행한지 알고 있잖니? 내가 너를 행복하게 해줄게.
나 : 행복하게요? 어떻게요?
하나님 : 그 여인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나에게 기도하렴. 그녀를 꼭 붙잡고 있는 사단의 모습을 생각해 보렴. 죄에 넘어져 너에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렴. 그리고 나서 너도 내가 주는 용서의 경험을 맛보렴. 내가 너와 함께 한 것처럼 내가 그녀를 도울 수 있도록 기도하렴. 그러면 너를 누르고 있는 복수라는 죄에서 너는 자유로워질 것이고 그제서야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을 거란다.
나 : (침묵...그리고 한숨 후) 오, 주님, 당신이 맞습니다. 언제나 주님이 옳으시죠. 그리고 복수하는 것보다도, 전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한숨) 맞아요.
그래요, 그녀를 용서하렵니다.
하나님 : 그래, 잘했다! 마음이 평안하다는 걸 느끼니?
나 : 네. 마음이 평안해요. 오늘 밤에는 잠을 잘 잘 수 있을 거에요. 그녀와의 일을 생각하는 동안 잠을 깊이 잘 수 없었어요.
하나님 : 그래, 나도 안다. 아직 기도를 다 안 마쳤지?
나 : 아, 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하나님 : 그래, 그래. 내가 그렇게 도와줄게. 단지 시험 받을 만한 곳에 가지 말아야 한단다.
나 : 무슨 뜻이세요?
하나님 : 무슨 뜻인지 다 알잖니.
나 : 네, 알아요.
하나님 : 그래.
나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 어떤 것이 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인지 이제 너는 알거라고 믿는단다.
나 : 네, 주님만 믿고 주님만 선택하여 주님만 따라 갈께요. 오늘 하루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늘 제 옆에 계셔서 저를 붙들어 주세요.
하나님 : 그래, 오늘 너는 참다운 기도를 했구나. 나를 따라오렴.
나 : 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기도와 의무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간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모든 축복의 통로이다. 회개하는 영혼이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 투쟁을 보시고 갈등을 지켜보시며, 그 진실성을 주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의 맥박에 손을 얹으시고 모든 고동을 기록하신다. 감동을 주는 어떤 감정도, 동요를 일으키는 어떤 정서도, 그늘을 가져오는 어떤 슬픔도, 영혼을 더럽히는 어떤 죄도, 생애를 움직이는 어떤 사상이나 목적도, 하나님께서는 다 아신다. 우리가 정직한 심령으로 그분께 나아가는 한, 그분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시고 우리의 마음과 생애를 치료해 주신다. 기도는 우리와 하나님을 연합시킨다. 기도는 지치고 고달픈 영혼에게 새로운 힘과 신선한 감동을 준다.

기도는 우리의 의무와 상식을 대신하지 않는다. 믿음과 행함이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기도와 행함 역시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으며, 또한 각자가 해야 할 의무도 주셨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환자가 의사에게 진찰받기를 원하시는가? 아니면 먼저, 환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다음, 그분께 도움을 요청하길 원하시는가? 아니면, 의사에게 가지 않고 믿음으로 병이 낫기를 기도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한마디로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요구하시며, 그러한 우리의 태도에 축복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일이 어려움에 봉착하거나,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할 경우에만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한 기도는 비 오는 날에만 기도하는 구두닦이 소년의 기도와 같은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기도와 의무는 병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를 하나님께 여쭈어 보면서 우리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도움을 구하듯이 말이다. 그분의 뜻과 섭리가 무엇인지를 살피면서, 우리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대로 밀고 나가다가 스스로 탈진되어 포기 상태에 이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양심과 지성을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 둘 다를 사용해서 그분과 교통하고 그분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

이 책자를 통하여 독자는 올바른 기도와 기도를 하는 이유, 응답받는 기도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새로운 각도로 기도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사람이 공기가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교통인 기도가 없으면 영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매일 하늘을 향하는 영적인 호흡인 기도로 살아가자! 기도로 하나님과 더욱 가까이 교제하는 독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posted by Jangjaed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