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College :: 제31호 하나님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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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하나님의 뜻대로 배우려 함
Jangjaedang

제31호 하나님의 날

하나님의 표

제 1 부 : 누가 그 날을 거룩하다고 하였는가?

1. 진리를 찾는 사람들

성경 시편 43장을 읽어보면, 우리는 다윗이 드렸던 아름다운 기도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기도 중에 가장 아름다운 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시편 43:3.

만일 우리가 진실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열심과 소원이 언제나 불타오르고 있어야 한다. 늘 진리가 무엇인지 찾는 것과, 또 찾은 진리에 순종하려고 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 인도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이다. 이러한 성도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약속이 성취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 임이요.”마태복음 5:6.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베푸실 수 있는 가장 큰 은혜는 그분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간구하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 속에 진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열심과 소원이 없다면, 진리를 구하는 우리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가장 위선적인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달라고 기도한 후, 그분의 응답이 내가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이르러 왔을 경우에,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범하고 있는 죄는, 성경의 진리가 요구하는 바대로 그들의 경험을 끌어올리는 대신에, 성경의 진리를 그들이 경험하는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어떤 가르침도 검증할 수 있는 위대한 표준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 말씀이다. 모든 종교적 사상, 모든 설교, 모든 충고들이 성경 말씀에 의해서 정확하게 판단될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진리는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숫자나 경향이나 느낌이나 전통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표준이 되기에는 너무나 미약하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것에 대해서 신실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실함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종종 잘못된 가르침을 신실하게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나는 플로리다 주에 있는 웨스트팜이라는 도시를 향하여 운전하여 간 적이 있다. 밤시간에 운전을 하였기 때문에 도로 표시와 길 이름을 확인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벨리 그레이드라고 쓰여진 커다란 도로 표시가 잘 보이는 위치에 나타났다. 그 순간 나는 지난 몇 시간 동안 엉뚱한 방향으로 운전하여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잘못된 길을 신실하고 열심히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운전하였던 것이다. 그 길이 웨스트팜을 향하여 가는 길이라고 믿고 갔지만, 실제에 있어서 나는 정반대 방향의 길을 운전하였던 것이다.


그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되는가? “계속 가면 결국에는 웨스트팜이 나올 거야”라고 말하면서 잘못된 길을 고집해야 되는가? 아니면 빨리 자동차를 돌려서 웨스트팜 쪽으로 가는 길을 달려가야 하는가? 지혜 있고, 상식적인 판단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못을 깨닫는 즉시 차를 올바른 방향으로 돌릴 것이다.

2. 귀와 눈을 막고 다수결의 원칙을 고집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잘못을 교정하라고 촉구한다. 가장 비극적인 일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통적인 견해와는 크게 다른 진실을 제시할 때 저항한다. 그들의 마음에 한번 자리를 잡은 견해는, 아무리 논리적이고 성경적으로 설명한다고 할지라도 바뀌지 않는 경향이 있다. 특히, 안식일에 관한 진리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한 경향을 나타낸다. 어떤 사람들은“안식일”이라는 말만 들어도 경계하며 피하려고 애쓴다. 왜 그러한 반응을 나타낼까?

수많은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에 관한 지식을 오랜 세월 동안 아무런 검증 없이 물려받아 왔다. 그러므로 그러한 입장에서는 예배일에 대한 진리를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고 생각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십계명중의 하나가 일곱째 날을 기억하여 예배일로 준수하라는 계명인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일곱째 날이 토요일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날과는 다른 날을 예배일로 준수하는 전통을 따르고 있다. 그들은 비 성경적인 예배일인 일요일을 준수하기로 고집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배하라고 하신 날은 제 칠일 “토요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왜 그러한 결정을 할까? 일요일을 준수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가르침 받아 왔으며, 또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일요일에 교회에 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일 중 첫째 날인 일요일을 자신들의 예배일로 준수하게 되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군중 속에서 안전감을 느끼는데, 그리스도인들도 다수가 믿는 가르침을 아무런 생각이나 판단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안전감을 얻으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자세와 태도는 정말 안전한 것인가? 종교적인 문제나 진리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도 다수결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진리와 오류를 구분하는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도, 민주주의 표결 원칙이 적용된다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하게“No”(아니요) 라고 대답한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모든 기록들을 살펴 볼 때, 적어도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다수가 항상 틀려왔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오류와 진리의 투쟁이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졌을 때마다, 항상 진리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었다는 것이 성경과 세상 역사가 증거하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도“노아의 때에 된 것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마지막시대에 진리가 다수의 사람들에게 거절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셨다(누가복음 17:26). 오직 8명만이 홍수 때에 방주 안으로 들어갔었던 사실을 기억하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에도 상대적으로 소수의 사람들이 구원 받을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태복음 7:13-14.

이 말씀은 오늘날 기독교계를 볼 때에 얼마나 정확한 말씀인가! 매우 유명한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제 칠일 안식일 대신에 일요일을 예배일로 지키고 있는 현실을 보라! 이 말은, 유명한 목사들과 많은 신학자들이 일요일을 준수하고 있기 때문에 일요일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준수하는 일요일을 성경에서 나오는 빛으로 비추어 보았더니 너무나 형편없는 오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를 통해서 진리는 항상 대다수의 군중에게 인기 없는 것으로 취급 받아 왔다.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대다수의 군중들은 부드럽고, 쉬우며, 안락한 종교를 추구함으로써,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기를 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제 칠일인 토요일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빛에 비추어 봄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교회에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연구한 경험이 전혀 없다. 여러분은 이 책자를 연구하면서 과연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날로 지키고 있는 일요일이 정말 거룩한 날인지를 시험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시험해 본 후, 만일 일요일이 성경적으로 구별된 거룩한 예배일이라면, 제 칠일 안식일인 토요일을 예배일로 지키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올바르게 교정하여 일요일을 신실하게 준수해야만 할 것이다.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을 진리로 인정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서 예배일로 안수하시고 인치신 날에 대해서 진지하게 연구해야만 한다.

먼저, 이 문제를 연구하기 위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은, 성경이 주일 중 첫째 날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그에 관련된 모든 말씀들을 연구해 보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만이 가장 정직하고 진실된 답을 얻을 수 있다. 신약 성경에서, 일요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성경절은 모두 합해서 8개에 불과하다. 이 8개의 성경절을 주의 깊게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찾고 있는 진리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어떤 사람도 이 8개 이외의 다른 성경절에서 일요일 준수에 관한 내용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이 8개의 성경절만이 주일 중 첫째 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독자들에게 질문들을 던져 본다. 지금 우리가 찾고자 하는 진리가 어떤 것이 되든지 간에, 여러분은 그것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편견과 전통이 무엇이든지간에 진리를 선택할 만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가? 진리가 요구하는 희생과 댓가가 아무리 클지라도, 당신은 끝까지 진리의 길을 걸을 것인가? 이 성경 연구를 통하여, 어떤 새로운 진리가 우리 앞에 드러날지라도, 당신은 진리를 받기 위하여 자신의 편견과 사사로운 견해를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매우 중요한 질문들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가운데 여기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 성경 연구가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지라도, 새롭게 깨달은 진리와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계속해서 걸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우리는 안식일이 어떤 날이 되든지, 즉 그 날이 월요일이 되든지, 또는 수요일이나 금요일이 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는 날을 안식일로 구별하여 준수하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라면, 안식일이 어떤 날이든지 간에 거룩하게 지키겠다는 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야 한다. 지금부터 신약 성경에 나오는 일요일에 관한 기록을 살펴볼 때에, 부디 참된 그리스도인다운 자세와 마음을 유지하며 진지하게 연구하게 되기를 바란다.

3. 일요일에 부활하심

복음서 중에서 첫 번에 나오는 마태복음부터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dawn)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마태복음 28:1.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안식일이 주일 중 첫째 날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안식일이 끝나가는 시간에 첫째 날이 시작되며, 안식일과 첫째 날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날이다. 성경의 이같은 말씀을 근거로 해서 볼 때, 누구도 첫째 날을 안식일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렇게 부르는 것은 사람들을 혼동시키는 것이며, 또한 비 성서적인 것이다.

여기서, 사도 마태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안식일이 끝나고 이어지는 날인“안식 후 첫날”에 여인들이 무덤에 왔는데, 그때는 이미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라는 것이다. 다음의 마가복음서에는 사도 마태가 기록한 말씀과 완전하게 일치할 뿐만 아니라, 이보다 조금 더 자세한 장면이 나타나 있다. 여기서 마가는 마태가 말한“미명(dawn)”을“해 돋은 때(the rising of the sun)”로 설명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 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마가복음 16:1-3.

이 성경절은 앞서 마태가 말한“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오해를 깨끗하게 해소시켜 준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토요일 저녁에 해가지기 직전이라고 해석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히브리 사람들의 주일 계산법에 따라서, 안식일 저녁에 해가 지면서 한 주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안식일 저녁에 해가 지기 직전에 즉, 첫째 날이 시작되기 직전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왔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여인들이 무덤으로 토요일 밤에 왔다는 일부의 주장을 물리칠 수 있다. 우리는, 마태가 말한“미명”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일요일 이른 아침을 뜻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첫째 날에 관해서 신약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세 번째 성경 절은 마가복음 16:9에 나와있는 그대로이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약간의 설명을 곁들이자면, 신약 성경에는 부활과 주일 중 첫날을 직접적으로 함께 설명하는 두 개의 성경 절이 있는데, 이 성경 절이 그 두 개중의 하나이다. 또한 한가지 주목해야 될 사실은, 일요일 새벽에 이루어진 부활을 이야기하는 어떤 성경 절에서도 첫째 날을 거룩한 날로 취급하지 않는 점이다. 부활을 기념하여 거룩하게 준수하라는 어떠한 암시적인 기록도 신약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4. 주일 중 어떤 날이 참 안식일인가?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중요한 장면을 보게 되는데, 다음에 나오는 4개의 성경 절을 주의 깊이 읽어보자. “(아리마데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누가복음 23:52-54. 나머지 두 개의 성경 절을 읽기 전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던 날에 대해서 살펴보자.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십자가의 죽음사건이“거룩한 금요일(Good Friday)”이라고 불리우는 날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그 날을“예비일(preparation day)”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날은 안식일을 준수하기 위한 특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54절에 나오는“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라는 말의 의미는, 이제 곧 안식일이 시작될 것이라는 뜻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던 예비일에 무슨 다른 일이 있었는가?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55-56절.


예수께서 돌아가셨던 금요일에, 신실한 여인들은 일요일 아침에 예수님의 시신이 있는 무덤으로 돌아와서 사용할 향품과 향료를 준비하였다. 그런 다음, 해가 지자 안식일이 되었고, 여인들은“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십계명에 나오는 제 칠일 안식일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도 계속해서 준수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유월절과 같은 절기 안식일을 십계명에 기록된 제 칠일 안식일과 혼돈하는데, 절기 안식일은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폐지되었으나, 제 칠일 안식일은 그리스도 교회에 배도가 들어와서 안식일이 사람에 의해서 변경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준수되었다. 절기 안식일은 해마다 그 준수하는 날이 변경되지만, 제 칠일 안식일은 언제나 제 칠일인 토요일에 준수되었다.

다음에 이어지는 성경 절에서는, 여인들이 안식일이 지난 일요일 아침에 무엇을 하였는지가 기록되어 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 운 것을 보고.”누가복음 24:1-2


여기서, 우리는 여인들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에 교회에 가지 않고 무덤에 찾아와서 일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들은 주일 중 첫째 날을 부활절 일요일로서 성별하고 있다. 예수께서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어떠한 이의도 제기할 수 없다. 그러나 여인들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어떤 인물도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을 거룩한 날로 성별 하였었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누가복음 24장에 나오는 십자가 주말에 대한 누가의 설명 덕분에, 오늘날에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진짜 안식일이 정확하게 어느 날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날은 예비일인 금요일이었으며, 안식일인 토요일에는 여인들이“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었을 뿐 아니라 예수께서도 무덤에서 쉬셨다. 그리고 일요일 새벽에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로 볼 때, 금요일, 토요일, 그리고 일요일로 이어지는 이 놀라운 사건에 대한 기록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안식일이 어느 날이라는 사실을 정확한 음성으로 말해주고 있다. 예수께서 일요일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토요일이 안식일이라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십계명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제 칠일 안식일은“여호와의 안식일”인데, 그 날은 토요일임에 틀림이 없다(출애굽기 20:10).

매우 흥미 있는 사실은 예수께서 창조 사업을 마치신 후 안식일에 쉬셨던 것처럼, 모든 구속 사업을 마치실 때도 안식일에 무덤에서 쉬셨다는 것이다.


안식일 다음 날에, 예수께서는 부활하셨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을 부활절 일요일이라고 부름으로써 특별한 의미를 일요일에 부여하려고 하지만, 성경은 그날을“주일 중 첫날”이라고 부름으로써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인정하는 이러한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어떤 사람도 안식일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겨도 된다는 주장을 할 수 없다. 안식일은 성 금요일(Good Friday)과 부활절 일요일 사이에 존재한다. 사도 누가가 3일 동안에 걸쳐서 일어난 사건을 시간적으로 정확하고 단순하게 기록하였기 때문에,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성경에서 말하는 제 칠일 안식일이 달력에서 어떤 날을 가르키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자, 이제 일요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5번째 성경 절을 살펴보자.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여기서도 요한은 다른 사도들이 그러했듯이, 주일 중 첫째 날이 거룩하거나 특별하게 지정된 날이라는 암시조차 주지 않은 채, 일요일을 평범한 날로 표현하고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사도들의 모든 기록들에 있어서, 우리는 일요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된다고 표현하는 기록을 찾는 일에 실패하였다.

5.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도 요한은 20장에서“첫날”에 대해서 다시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일요일 예배를 입증하는 성경절로 잘못 인용되고 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평강이 있을 찌어다.”요한복음 20:19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에 문을 걸어 잠그고 모인 이 모임이 부활을 기념하기 위한 특별한 예배 모임이었는가? 요한은 그들이 그때 거기에 모였던 이유를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다.“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무덤이 비게 되자, 유대 지도자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고소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은 제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주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변명하기 어려운 입장으로 몰릴 것을 알고 두려워 떨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보호하며,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서 방에 모인 다음에 문을 굳게 닫았던 것이다.

사실, 그때만 해도 제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사도 마가는, 예수의 부활을 실제로 보았다는 마리아의 증언을 제자들이 믿지 않았었음을 기록하였다.“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그들은 예수께서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그 후에 저희 중에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이더라.”마가복음16:10-14

이러한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서, 우리는 제자들이 일요일 오후에 한 방에 모여서 문을 굳게 잠그고 숨어있던 광경을 짐작할 수 있다. 문을 잠근 방에서 가진 그들의 모임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한 기쁨과 환희에 가득찬 분위기가 아니었다. 사실, 그때 그들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모임의 분위기는 무섭고 두려우며, 낙망과 불신의 분위기였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분께서는 제자들의 불신과 또 그들이 마리아와 동료들의 말까지도 거절하였던 것에 대해서 심하게 책망하셨다. 어떻게 이러한 모임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즐겁고 기쁨에 넘치는 예배 모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8개 중에서 6개의 성경 절을 면밀하게 살펴보았지만, 일요일을 거룩하게 준수해야 된다는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성경절도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에 있어서, 6개 성경 절은 모두 일요일을,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기도와 찬미와 휴식의 날로 지정하는 대신에,“주일 중 첫날”로 평범하게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부활이 있은 후 몇 해가 지난 다음에 복음서들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성령께서 복음서를 기록한 사도들에게 주일 중 첫날인 일요일에 일어났던 부활을 거룩하게 기념하기 위한 기념 예배를 정기적으로 드리라는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성령이 하는 일을“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으로 정의하셨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6:13). 만일 주일 중 첫째 날을 준수하는 것이 진리에 속한 것이라면, 성령께서는 그 진리를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과 같은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드러냈을 것이다.

이제, 총 8개의 성경 절 중에서 두 개의 성경 절만이 남아있다. 만일 우리가 나머지 두 개의성경 절에서도 일요일 신성성에 대한 진리를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일요일 예배에 대한 연구 조사의 결론을 매우 깨끗하고도 분명하게 내릴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더 이상 찾아보아야 할 성경 절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는“주일 중 첫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성경 절이 오직 8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주일 중 첫날에 대해서 언급하였던 마지막 사도는 바울과 누가인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 두 사도가 말했던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

6. 존재하지 않는 고린도 교회의 일요일 모임

고린도전서 16:1-2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는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lay something aside, storing up),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을 정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성경 절이 말하는 바를, 고린도 교인들이 교회에 모여서 어떤 종교적인 예배 모임을 가졌으며, 그때 헌금을 거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성경 절에는 그러한 의미가 전혀 담겨 있지 않다. 이 성경 절에는 단지 주일 중 첫날에 어떤 것들을 저축하여 모아두라는 바울의 부탁이 있을 뿐이다. 바울은 소아시아 지방에 있는 교회들에게 특별 호소를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예루살렘 지방이 기근으로 인하여 음식물과 일용품이 부족하여 크게 고통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지방에 있는 교회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구제 물을 옮길 수 있는 사람을 보낼 때까지 음식물과 옷 등을 각자 집에 모아서 보관해 줄 것을 호소하였던 것이다. “저축하여 두어서(lay something aside, storing up)”의 헬라어 원어에는“집에 보관한다”는 의미가 분명하게 포함되어 있다. 일요일 예배를 주장하는 신학자들 역시 이러한 헬라어 해석에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 문제를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일 중 첫날에 정기적인 예배가 개최되었다는 어떠한 증거도 이 성경 절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단지 주일 중 첫날에 구제품을 모아서 저축하는 일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안식일에는 예배를 드렸으며, 다음 날인 주일 중 첫날에는 각자가 구제품을 모아두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예루살렘에 심한 기근이 내렸었다는 사도 누가의 기록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사도행전11:28-30

7. 가장 길었던 바울의 설교

이제, 일요일 신성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증거로서 제시하는 마지막 성경 절을 살펴보자. 사도 누가는 바울이 드로아에서 신자들과 함께 보낸 매우 극적인 송별 모임에 대해서 사도행전에 서술하였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이 성경 절을 하나님의 십계명에 대한 불순종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구차한 핑계거리로 사용하고 있다. 드로아 신자들이 베푼 이 송별 모임은 신약 성경에서“주일 중 첫날”에 이루어진 유일한 종교 모임이므로, 우리 모두는 매우 특별한 관심과 주의를 가지고 이 성경 절을 살펴보아야 한다.

전체적인 문맥을 볼 때, 송별 모임은 밤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잇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자고 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사도행전 20:6-13

드로아에서 개최된 밤샘 모임에서 몇 가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첫째로, 이 모임은 바울 자신이나 신자들에게 매우 엄숙하고도 애절한 모임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같은 장 25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예언적 발언을 하였기 때문이다.“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분명한 사실은, 이 송별 모임이 밤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방에 불이 켜져 있었으며, 바울이 밤중까지 설교를 계속하였다. 여기서 유대인들이 시간을 계산하는 방식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성경에서 하루는 저녁에 시작된다. 창세기에서 창조 주일의 날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보면,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첫째 날 ...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둘째 날 ...” 즉, 하루를 계산하는데 있어서 항상 저녁이 시작점이 되었다.

레위기가 묘사하고 있는 안식일 시간대를 보라.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레위기 23:32. 그런데 성경에서 저녁은 어느 시간을 말하는가?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마가복음1:32.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하는 것을 금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병자들을 예수께 데리고 왔다. 그래서 그들은“저물어 해질 때에”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예수께 데리고 온 것이다. 모세는“네가 애굽에서 나오던 시각 곧 초저녁 해질 때에 드리고(sacrifice the passover ... at the going down of the sun)”이라고 기록하였다.


느헤미야서에서, 우리는 안식일의 시작에 대한 또 하나의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안식일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 갈 때에 내가 명하여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 내 종자 두어 사람을 성문마다 세워서 안식일에 아무 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매.”느헤미야 13:19. 이 성경 절은 안식일의 시작점이 해가 져서 어두워지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성경 원칙을 바울이 드로아에서 개최한 첫째 날 모임에 적용시켜보자. 안타깝게도, 이 모임이 이루어진 밤은 토요일 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안식일 예배를 마친 다음,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기 위한 송별 모임을 그날 저녁에 계속해서 가졌던 것이다. 해가 지면서 안식일이 끝나고, 안식 후 첫날이 시작되었다. 7일 동안 드로아에서 머물렀던 바울은 안식일에 드로아 신자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날 저녁에 배로 떠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신자들에게 밤새 강론한 다음, 일요일 아침에 약 20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앗소에 도착하여 배를 탐으로서 그의 동료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 마지막이 될 자신의 선교 여행을 떠나기 전에 드로아 신자들과 함께 안식일을 보내고, 이어서 안식일 저녁부터 밤중까지 계속해서 송별 집회를 가졌던 것이다.

8. 누가가 말하고자 했던 것

새 영어성경(New English Bible)에는, 사도행전 20:7에 나오는 송별 집회가 열린 시간을“토요일 밤”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 집회에 관한 이야기에서, 사도 누가는 가장 중요한 초점을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서 떨어져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실에 집중시키고 있다. 지칠 줄 모르는 바울은 안식일과 토요일 밤중까지 계속해서 집회를 인도한 다음, 일요일 아침에 20마일을 걸어서 앗소에 가서 그의 동료들과 합류하였다. 그의 동료들은 안식일이 끝나는 토요일 저녁에 먼저 배를 탔으며, 그들이 탄 배가 밤새 운행하여서 앗소에 도착하였을 때, 바울이 승선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일요일 아침에 먼 거리를 도보로 여행하였는데, 만일 일요일이 부활절로 신성하게 지켜지는 날이었다면, 바울은 일요일 아침에 그러한 도보 여행을 함으로써 거룩한 날을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떡을 떼었”다는 사실로 미루어서 그날 집회는 성찬식(communion service)이었다는 주장을 펼치는데, 그러한 견해는 성경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사도 누가는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날마다 떡을 떼었던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사도행전2:46

바울이 드로아 신자들과 함께 윗 다락에서 성찬식을 하였다는 주장은 성경에 의해서 뒷받침될 수 없다. 그들이 함께 나눈 떡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식사였음을 문맥에서 알 수 있다.“다시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When he therefore was come up again, and had broken bread, and eaten).”여기서 우리는 떡을 떼는 것이 그들이 먹는 식사와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일 그것이 성찬식이었다면,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요일을 준수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비록 그 환송 모임에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을 기념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 모임은 일요일을 정기적으로 준수해야 된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어떤 사람도 드로아에서 열렸던 집회가 정기적으로 열리는 주말 예배였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다. 그 집회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유두고라는 젊은 청년이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난 일과, 드로아 신자들과 바울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가장 강조하여 기록했던 것은 유두고라는 청년이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었다. 누가는 토요일 밤중까지 계속되었던 바울의 설교 내용에 대해서 조차 언급하지 않았으며, 토요일 밤 즉“주일 중 첫날”이 영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에 관한 어떤 암시도 주지 않았다. 누가가 말하고자 하였던 것은 밤중에 집회하다가 떨어진 유두고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이었지, 그 밤중 집회의 중요성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일 중 첫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신약 성경의 모든 성경 절들을 살펴보았다. 8개의 성경 절 모두, 일요일이 하나님이나 제자들에 의해서 거룩한 날로 지정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 어떠한 지지나 동의도 보내지 않았다. 하나님의 위대한 책인 성경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진리 대신에 인간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밝혀주었다. 수백만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방 종교인들에 의해서 세워진 날을 맹목적으로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일요일 준수 전통에 대한 이야기는 한 예화를 생각나게 한다.

그 예화는 제정 러시아 시대에 궁전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하루는 거대한 궁전 안에서 황제가 산보하고 있었는데, 한 병사가 어깨에 총을 멘 채 아무 것도 없는 황폐한 땅에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병사의 임무에 대해서 궁금해진 황제는 그 보초병에게 왜 여기서 보초를 서고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 병사는 대답하기를,“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앞 사람에게 임무를 인수인계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보초를 서고 있는 것입니다.”더욱 궁금해진 황제는 그 보초의 상급 지휘관을 호출하여서 그 보초의 임무를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 지휘관 역시 이유를 몰랐다. 이에 호기심이 동한 황제는 궁전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대장을 불러서 물어보았지만, 그에게서도 적당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마침내 황제는 대장에게 명령하기를, 수많은 군대 기록들을 조사하여서 그 병사가 왜 그 자리에서 보초를 서게 되었는가를 밝히라고 하였다. 드디어 보초의 임무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신비가 밝혀지게 되었다. 여러 해 전에 한 왕비가 왕궁 한쪽에 장미 밭을 가꾸었는데, 어느 날 왕비는 병사에게 장미 밭에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잘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세월이 흘러서 왕비는 죽고, 장미꽃밭은 없어지게 되었지만, 그 왕비의 명령은 철회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수행되었다. 날마다 병사가 정해진 보초 계획에 따라서 그 자리에 파견되었으며, 임무를 하달 받은 병사는 총을 어깨에 메고 아무 것도 없는 그 장소를 왔다 갔다 하면서 서성거리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지켜야 할 어떤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요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매 주말마다 교회에 나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명령에 어떤 잘못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일요일만 되면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교회에 나가고 있다. 왕궁의 장미 밭이 결국 황폐하여 사라진 것처럼, 일요일 역시 최후의 심판 날에 황폐하게 사라질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내 천부께서 심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태복음 15:13

9. 신약시대에 지켜졌던 날

일요일 준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모든 성경 절들을 살펴본 결과, 우리는 일요일이 거룩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주장의 허상을 보게 되었다. 이제, 초기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를 성경 속에서 살펴봄으로써, 그들이 어떤 날을 예배일로 준수하였는지를 확인해보자. 제자들과 신자들이 그 당시 일요일을 예배일로 준수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떤 날을 거룩하게 준수하였는가? 사도행전은 그들이 제 칠일 안식일을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계속해서 지켰음을 증거하고 있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종교 집회를 부탁 받았던 이야기를 읽어보자. “저희가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사도행전 42,44

이 성경 절에서, 우리는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안식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를 하였는데,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방인들은 바울에게“다음 안식일에”는 그들에게 설교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안식일에 오직 유대인의 회당에서 유대인들 만에게 설교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성경 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울은“다음 안식일”에 이방인들에게 설교하였다. 43절에는, 안식일 예배 설교를 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개종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에게“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라고 권면하였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식일에 설교를 듣고 개종한 사람들에게“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라고 격려하였는데, 현대 비평가들은 안식일 준수자들에게 율법주의자라는 딱지를 붙혀 줌으로써, 마치 안식일 준수자들은 복음의 은혜를 거절하는 사람들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다. 성경을 기록한 모든 저자들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생애를 살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사도행전 16:13에서,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도 없고, 유대인도 없는 곳에서 안식일을 준수하였던 확실한 증거를 볼 수 있다. 이 때, 바울은 그리스에서 전도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오직 소수의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있었을 뿐이며, 더구나 유대인들을 위한 회당은 전혀 없었다. 그가 거기서 안식일에 무엇을 하였는지 살펴보자.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 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안식일에 참석할 교회가 없자, 사도들은 예배를 드릴만한 장소인 강가 기도처를 발견하였는데, 그 곳에 모여 있던 여자들에게 설교를 하였다. 안식일에 이루어진 이러한 전도 활동을 보면서, 우리는 바울의 헌신과 열심을 볼 수 있다. 만약 바울의 이러한 전도 활동이 주일 중 첫날에 이루어졌다고 가정해보자. 아마 일요일 예배를 주장하는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은 이 성경 절을 일요일 예배를 위한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할 것인데, 이런 경우 그들의 주장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안식일을 준수하였던 바울의 모본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단 하나의 성경절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안식일에 대한 성경적 진리를 더욱 더 분명하게 해준다.

안식일 준수에 관한 또 하나의 증거가 나온다. 바울이 규칙적으로 안식일을 지켰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여기에 있다. “바울이 자기 규례대로(according to his customs)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사도행전 17:2. “안식일마다(every Sabbath)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 하니라.”사도행전 18:4

이제, 우리는 바울이 그의 생애 동안에 단 한번도 일요일을 거룩한 날로 준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성경절을 소개하고자 한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다음과 같은 말을 유대 지도자들에게 남겼다. “바울이 유대인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customs,규례)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준바 되었으니.”사도행전28:17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자. 만일 바울이 고의로 안식일을 범하거나 안식일 이외의 다른 날을 준수했다면, 어떻게 그가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자신이 유대인의 규례를 범한 적이 없다고 외칠 수 있었겠는가! 바울이 언급한“조상의 규례”에는 유대인들이 중요시 여겼던 안식일이 물론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조상의 규례를 배척한 일이 없”다고 주장하는 바울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바울이 유대 교회의 지도자들 앞에서 외친 마지막 호소에서, 우리는 그가 자신의 생애를 끝마치는 순간까지 철저한 안식일 준수자였음을 볼 수 있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바울의 강력한 호소는 우리로 하여금 일요일 준수가 성경적으로 입증될 수 없는 허상이라는 결론의 정확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게 한다.

만일 일요일이 성경적으로 거룩한 예배일이라면, 우리의 종교적 의무는 훨씬 쉬워질 것이다. 거의 모든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지지 속에서 일요일을 거룩한 예배일로 준수하는 것은, 율법주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참된 안식일을 지키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인기 있는 길이나 가장 편리한 방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경이 증거하는 길을 단순하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걷는 사람들이다. 이제, 우리는 정직한 마음으로 진실을 인정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 돌비에 친히 손가락으로 기록하셨던 제 칠일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을 준수하는 전통이 온 세상을 점령하고 있다. 마지막 날에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심판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인기의 정도나 어떤 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성경의 분명한 증거인“주께서 가라사대”라는 말씀을 폐할 수 없다. 안식일 문제에 관하여, 우리 모두는 오직 성경의 권위에만 의존해야 한다.

지금도 창조주 하나님께서는“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 아무 일도 하지 말라”라고 선포하고 계신다(출애굽기 20:10). 하나님께서 최고의 권위로 선포하신 도덕률을 당신 자신이 스스로 철회하지 않은 한, 우리 모두는 십계명을 오늘날에도 구속력이 있는 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한번 말씀하신 것에는 반드시 의미가 포함되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안식일 계명인 4번째 계명을 제하여 주셨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들의 주장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너무나 경쟁이 심하고 산업화되어 있기 때문에 제 칠일 안식일인 토요일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의심할여지 없이, 오늘날 이 사회를 조종함으로써 안식일을 준수하기 어렵게 만든 장본인은 사단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어떤 상황도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에 대한 적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회사에서는 토요일에 일해야 한답니다. 우리 가족을 굶길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대답이 오래 전에 산상수훈에서 주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답변을 들어보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여기에 나오는“이 모든 것”에는 음식과 옷과 직장도 포함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말씀과 회사의 규칙 사이에서 고통 받고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되지 않겠는가! 물질에 대한 염려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보다 우위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직장을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안식일을 지키기로 결심하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높이 평가하실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준수자들에게 기적을 행해 오셨다. 어떤 경우에는, 당신의 자녀들이 직장을 잃어버리는 것을 통하여 진리가 드러남으로써, 그분께서 영광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간구하는 기도와 그들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서 보다 나은 길을 열어주신다. 물질은, 우리가 환경에 상관없이 그분을 신뢰하고 순종할 때에 언제나 더해진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여호와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는 참된 비결은 우리의 마음에 안식일의 주인인 주님을 모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분께서 명하신 단 하나의 계명에 불순종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것은 사랑의 힘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 14:15. 계속해서 사도 요한은 사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요한일서 5:3

그러므로 안식일에 관한 문제는 날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문제이다. 이것은, 사랑을 통하여 순종하는 것과 사랑의 결핍으로 인하여 불순종하게 되는 것에 대한 문제이다. 이 두 성경 절 아래에 줄을 긋고, 계속해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보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마음 속에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생애를 기계적이고 비참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순종할 때, 모든 계명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즐겁고 가벼운 것이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한일서 5:3. 이러한 사랑을 안식일 준수의 기본 정신으로 삼는다면, 안식일은 여러분의 여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기쁜 날이 될 것이다.


제 2 부 : 왜 하나님께서 기억하라고 말씀하셨나?

권위 있는 조사와 앙케이트를 통해서 한가지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는데, 그것은 많은 현대인들이 성경에 나오는 창조를 부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보고서에서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하는 것은, 조사에 응한 목사들 중의 72% 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의심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창조론과 같은 기독교의 기본신조에 대한 불신은 동정녀의 잉태나 영원한 생명과 같은 기독교의 다른 기본적인 교리들까지도 부인하도록 유도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창세기의 기록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알고 계셨다. 하나님께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천연 계들을 단순히“있으라”고 명하심으로써 존재하게 되었다는 성경의 기록은, 많은 사람들에게 의심과 회의를 불러 일으켰다. 심지어 하나님의 창조론을 믿었던 아담의 후손들 조차도 창조 후에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수백만의 가짜 신들의 혼돈시키는 영향으로 인하여 창조의 기적을 잊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창조의 놀라운 역사에 대한 지식을 보존하시기 위해서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하실 필요가 있었다. 하늘과 땅을 말씀으로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과 잡신들을 확실하게 구분시켜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기적과 창조주가 영원토록 기억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창조에 대한 진리를 끈질기게 공격할 것을 알고 계셨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권위를 영원히 확고하게 만든 태초의 창조 주일의 기적들을 인류가 계속해서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셔야만 하였다. 인류가 하나님의 창조를 영원토록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분께서는 무엇을 만드셨을까?

1. 창조 -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표.

하나님께서는 창조 주일의 일곱째 날을 거룩한 날로서 떼어 놓으셔서 쉬고 기억하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창조의 능력을 기념토록 하셨다. 그렇게 하는 것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주권을 기억하고 인정하도록 하기 위한 강력한 안전장치가 될 것이며, 동시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지 않은 모든 잡신들의 정체를 샅샅이 폭로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기록은 하나님의 창조의 특별한 능력을 기억하는 찬미를 자주 불렀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예레미아는 이렇게 표현했다.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 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시요 ...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예레미아 10:10-12.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의 진리를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신다는 사실을 인류의 눈으로 확인하기를 원하셨다. 그렇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위대한 도덕율인 십계명을 돌비에 기록하셔서 모든 영혼들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하고 기억하도록 하셨다. 십계명이라는 영원한 원칙들 위에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를 세우셨으며, 그분 자신의 완전한 품성을 나타내어 보이셨다.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셨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들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애굽기 20:8-12.

창조의 놀라운 역사를 기념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경이로운 지혜와 빛을 인류에게 제공하시기로 결정하셨다! 마치 지구가 지구 축을 중심으로 하여 회전하듯이, 안식일을 기억하는 자들은 지구 위의 여러 곳을 다니며 모든 남녀노소를 만날 때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6일 동안에 창조하셨다는 기별을 전하도록 하셨다. 왜 하나님께서“안식일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을까?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또한 안식일을 잊어버리는 것은 창조주를 잊어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태초 이래로 모든 인류가 안식일을 정확하게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왔다면, 이 세상에 거짓 신들이나 무신론주의자들이 이처럼 세상을 뒤덮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2. 회개 - 창조적인 능력의 역사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물리적인 물질들을 창조하신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도 가지고 계시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물질의 창조와 마음의 재창조는 두 개의 별 개의과정이지만, 동일한 근원으로부터 생성된 과정이다. 회개나 마음의 재창조에도 물질을 창조하는 것과 동일한 정도의 능력이 요구된다.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create)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4. 사도 바울은, 참 하나님과 모든 가짜 신들을 구분 짓는 것이 창조의 능력이므로, 하나님의창조의 능력에 의해서 거듭난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만이 참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창조의 기념일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표(sign)가 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sign)을 삼았노라” 에스겔 20:12.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하게 되는 표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안식일을“거룩하게 하라”라는 말의 의미는 거룩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따로 구분하여 놓으라는 뜻이며, 또한 하나님의 재창조 능력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신다는 의미도 된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마귀가 왜 제 칠일 안식일을 대항하여 그렇게도 끈질기고 필사적인 전투를 감행해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거의 육천 년 동안, 그는 하나님의 권위의 특별한 표시인 안식일의 존엄성을 파괴하기 위해서, 전통과 잘못된 지식 및 종교적인 편견을 통하여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권위의 표인 안식일은 창조주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단의 기만과 계략을 온 천하에 드러낸다. 사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이사야 14:13,14. 사단은 자신이 경배 받기를 원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사단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위와 그분의 주장을 무효화시키고자 하였다. 하나님의 권위는 그분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것을 근거로 이루어지는데, 안식일은 바로 그 권위의 표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은 진짜 안식일을 파괴하고 가짜 예배일을 만들어 냄으로써, 하나님의 권위를 찬탈하고 이것을 근거로 하여 자신의 정부를 세울 준비를 갖추었다.

3. 권위를 중심으로 한 전쟁

과거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에 치루어진 대쟁투를 되돌아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그 투쟁의 초점은 항상 권위 문제에 맞추어졌다. 마귀는 창조주 하나님께 대항하기 위해서 두 가지의 예리한 공격을 가해 왔는데, 첫번째는 진화론이며, 두번째는 창조주의 표인 제 칠일 안식일의 파괴이다. 사단은 오랜 세월 동안에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점차적이면서도 끈질긴 시도와 노력을 기울였다. 하나님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려는 사단의 시도가 상상 이외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다윈의 유기적 진화론의 영향으로 인하여 종교적인 회의주의자나 불가지론 자들로 변해 버렸다. 타락한 사람은 “자신을 죄에서 구원해 줄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성경의 진리를 반박하는 진화론은 창조의 사실뿐만 아니라 구속의 계획에도 치명타를 남겼다. 또한 참 안식일에 대한 사단의 공격은, 하나님께서 모든 율법에 대한 특별한 순종의 표로서 주신 안식일을 왜곡시킴으로써, 십계명 중에서 한가지 계명을 불순종하거나 무시하도록 수백만의 사람을 미혹시키는 성공을 거두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수백만의 그리스도인들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사단은 매우 교묘하고 노련한 전략을 세웠다. 그것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서히 성취되는 전략이며, 또한 여러 시대에 걸쳐서 사람들의 마음을 기만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사단의 전략에는, 하나님을 섬기다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사단을 섬기기로 돌아서는 따위의 극적인 일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사단은 모든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기만과 속임수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단의 기만 가운데는 종교적인 속임수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사단은 바울이 로마서 6:16을 기록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그 원칙을 이해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순종은 충성과 경배의 대상을 결정하는 최고의 표이다. 만일 사단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불순종하게 할 문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순종하도록 만드는 기회를 갖지 않겠는가? 그는 하나님의 법을 전복시키기 위한 결정적인 도전을 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파괴시키고, 사람들의 순종을 자신에게 돌릴 수 있을까? 하나님의 율법 가운데서 어떤 계명을 공격하는 것이 가장 결정적이고 효과적인 것이 될까? 하나님의 창조력과 그분의 다스리시는 권위를 나타내는 4째 계명을 공격하는 것이 가장 치명적인 공격이 되지 않겠는가? 안식일은 누가 참 하나님인가를 말해 주는 표임을 알고 있는 사단은 태초 이래로 계속해서 안식일을 증오해 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그분의 율법에 충성하고 있는지를 시험하는 표로서 안식일을 택하셨던 것이다.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애굽기 16:4.

4. 율법을 시험하는 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모든 십계명을 준행하는지 하지 않는지에 대한 표로 삼으셨기 때문에, 사단은 안식일을 모든 시대를 통하여 커다란 문제거리로 삼기로 결심했다. 안식일을 파괴하고 가짜 경배일을 만드는 사단의 어마어마한 계획은 오래 전부터 진행되었다. 사도들과 제자들이 죽은 이후에, 사단은 이교의 영향을 서서히 받아들인 타협한 그리스도교회의 연약함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사단은 자신이 만든 가짜 예배 제도를 강요하기 위해서 세계적인 종교 국가를 설립했다. 그 국가는 로마였다.

이교 로마의 황제인 콘스탄틴의 정치적인 회개로부터 시작하여 1000년 이상 계속된 배도의 검은 역사 가운데에서 안식일에 대한 사단의 계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고 공언하는 콘스탄틴 황제가 첫 번째로 취한 조치는, 주일 중의 일곱째 날인 안식일 준수를 반대하는 법을 제정하고, 이방 종교의 태양 숭배 날로 준수되던 주일 중의 첫째 날에 쉬도록 하는 법을 공포하는 것이었다. 황제는 태양 숭배자들과 그리스도 교인들을 종교적으로 교묘하게 연합시킴으로써,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기독교 역사를 정직한 양심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이교의 일요일을 준수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사형시키겠다고 공포한 이교 협의회의 결정을 알고 있다. 이것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역사적인 기록을 찾을 수 있다. 4-5세기 동안에, 주일 중 첫째 날은 이교의 활발하고 강압적인 선교(?) 덕분에, 성경이 증거하는 참 안식일을 대신하여 높여지게 되었다.

참으로 불행한 사실은, 기독교회 지도자들의 편견과 잘못된 지식으로 인하여,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 준수가 일요일 준수로 변경된 것을 증명하는 역사적 증거들을 정확하게 볼 수 없는 현재의 상황이다. 우리는 그들이 가진 편견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생기게 되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사단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자신의 공작을 펼쳐 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안식일에 대한 역사를 자연스럽고 쉽게 거절하게 되었다. 여러 시대를 통하여서,그는 자신의 위조 경배일에 대한 순종을 강화하기 위하여 미묘한 거짓 논조들을 세우는데 성공했다. 그는 지금도 참 하나님을 가리키는 참 안식일을 미워한다.

우리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성경에서 한번도 지지하지 않은 날인 주일 중 첫째 날을 예배일로 지키게 된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무도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친히 쓰신 율법의 의미를 잘못 해석할 필요가 없다.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아무 일도 하지 말라.” 그러나 수백만의 사람들은 그 계명을 순종하지 않고 있다. 어떤 사람도 일요일이 이교제도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반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백만의 사람들은 십계명에 명백하게 지시된 안식일 대신에 일요일을 지키고 있다. 왜 그럴까? 거듭해서 말하지만, 그 이유는 여호와의 거룩한 안식일을 대항하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사단의 교묘한 논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논조들 가운데 몇 가지 궤변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5. 첫 번째 주장:“안식일은 오직 유대인들만을 위해서 제정되었다”

이러한 거짓말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안식일을“유대인의 안식일”이라고 부르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서도 그러한 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 일곱째 날을“여호와의 안식일”(출애굽기 20:10)이라고 불렀지, 결코“유대인의 안식일”이라 부르지 않았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가장 훌륭한 전도자로서 가장 많은 신약성경을 기록하였는데, 종종 유대인들에게만 특별히 관련이 되는 기록을 했다. 그는“유대 온 족속”(사도행전 10:22),“유대백성”(사도행전), “유대인의 땅”(사도행전 10:39), 그리고 “유대인의 회당”(사도행전 14:1)이라는 말은 했지만, 결코“유대인의 안식일”이란 말은 하지 않았던 사실을 유의하자. 비록 그가 안식일에 대해서 여러 번 언급했지만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마가복음 2:27)라고 분명하게 가르치셨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실 당시에는 이 세상에 오직 아담과 하와 부부만이 살고 있었다. 창조 이후에 적어도 2,000년이 지나기까지 이 세상에는 한명의 유대인도 없었다. 그러므로 창조 주일 당시에 안식일이 유대인만을 위해서 제정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태초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처럼, 결혼제도 역시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결혼하였다고 해서, 결혼 제도가 유대인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태초에 제정된 두 가지의 아름다운 제도인 결혼과 안식일 제도는 이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 자신이 세우신 것이다. 두 제도 모두 사람을 위해서 제정되었고, 두 제도 모두 창조주의 특별한 축복을 받았으며, 두 제도 모두 에덴 동산에서 거룩한 것으로 제정되었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거룩한 제도이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에덴 동산에서 안식일을 만드셨던 분은 예수님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그분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주장하시는 데에는 한가지 이유가 있었다.“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마가복음 2:28). 만일 그분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면, 안식일은 주님의 날 즉, 주의 날이라고 불리워질 수도 있다.

요한계시록 1:10에서, 사도 요한은“주의 날”에 계시를 보았다고 기록하였다. 사도 요한이 계시를 보았던 날은 주의 날 즉, 안식일이었다. 안식일은 성경 가운데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고안되고 주장된 유일한 날이다. 십계명을 기록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여호와의 안식일”(출애굽기20:10) 이라고 부르셨으며, 이사야서에서는“나의 거룩한 안식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이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셨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3,14.


바울은 예수님을 창조주로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 그의 사랑의 아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더라 ....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고” 골로새서1:13-16.

예수님을 안식일로부터 분리시키는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큰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창시자요, 창조자시며,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며, 안식일의 제정 자이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안식일에 부여하신 축복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그분의 권위를 부인하는 것이다.

“안식일은 유대인들만의 것이다”라는 논리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안식일이 창조 이후 어떤 한정된 기간 동안에만 존재했었다고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그것이 사실인가? 제 칠일 안식일은 결코 없어지거나 폐하여질 수 없는 것이다. 안식일은 인간 가족이 죄를 범하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것의 표상이나 그림자가 될 수 없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어떤 그림자들이나 의식들은 죄의 결과로서 제정된 것이며, 죄로부터의 구원을 설명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제정된 것이다. 그러한 것들 중에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을 표상하기 위한 그림자로서 제정된 희생제사제도가 있다. 죄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동물을 잡아서 제사 드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제사제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에 폐지되었는데, 왜냐하면 표상으로 사용되었던 제사나 의식이, 그 원형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 이루어짐으로써, 그 맡은 바 목적을 마치었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필요하지도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제 칠일 안식일은 표상이나 그림자를 의미하는 의문의 율법에는 포함될 수 없는 것이었다.

바울은 골로새서 2:14-16에서,“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것으로서 임시로 존재했던 제도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제도를 먹고 마시는 제사와 의식 법에 명시된 연중 절기들이라고 설명하면서, 그것이“폐지”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성경 절에 보면 안식일들(sabbaths)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이 그 안식일들을“장래 일의 그림자”인“안식일들(sabbaths)”이라고 부른 것을 주의 깊이 보아야 한다.

당신은 두 가지 종류의 안식일이 성경에 나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안식일이 십자가에서 폐지되었다는 말입니까?”라고 반문할 것이다. 자, 함께 이것에 대해 살펴보자. 그 당시 적어도 1년에 4번의 절기 안식일들이 있었는데, 바로 그 절기 안식일들이 폐지되었다는 말이다. 그 때에는 절기 안식일로서 일정하게 지정된 날이 있었는데, 바로 그 절기 안식일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폐지된 안식일인 것이다. 그것들은 그림자들이었으며, 특정하게 지정된 희생제물을 필요로 했다. 이 모든 연중 절기 안식일들은 레위기 23:24-36에 묘사되어 있으며, 36절과 38절에 잘 요약되어 있다. “이것들은 여호와의 절기라 너희는 공포하여 성회를 삼고 번제와 소제와 희생과 증제를 각각 그날에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안식일 외에”.


성경은 매년 있는 그림자로서의 절기 안식일들과 매주마다 있는“여호와의 안식일”을 명백하게 구분 짓고 있다.

의문의 율법에 명시된 절기 안식일들은 십자가에서 폐지되었다. 그 안식일들은 죄의 결과로서 첨가된 것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죄인들을 위한 희생을 단번에 치루시자, 그러한 것들은 더 이상의 희생 제물과 절기 안식일과 같은 제사 의식들이 필요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십계명에 명시된 제 칠일 안식일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거룩하게 되었고, 후에 하나님께서 친히 손가락으로 쓰신 위대한 도덕율중의 하나로 선정되었다. 그것은 그 특성 그대로 영원한 것이었다. 아직도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확실하게 믿어지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다음의 말씀을 들어보자!“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 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태복음 5:17-18.

6. “일곱 날 중 그저 아무 날이나 지키면 되지 않습니까?”

이 같은 논리를 통하여, 사단은 온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신 안식일을 대치할 어떤 날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돌비 위에 시대를 통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는 위대한 법을 기록하셨다. 모든 말들은 엄숙하고 의미 있는 것들이었다. 단 하나의 문장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양면성을 띄었거나 모호하고 신비한 것이 없었다. 죄인들과 그리스도인들, 배웠거나 배우지 못했거나를 막론하고 십계명의 단순하고 명백한 말들을 이해하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를 의도하는 것이며, 아무도 그 율법이 너무 복잡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모른척 하거나 무효화 시키려고 애쓸 수 없다.

십계명의 대부분은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되어 있다. “(너희는)하지 말 찌니라.”그러나 십계명의 중심부에 있는 넷째 계명은“(안식일을)기억하라”는 말로 끝난다. 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계명을 다른 계명들과 다르게 표현하셨을까? 그것은 전에는 존재했었지만 잊혀지게 된 어떤 것을 기억하라는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동안에 잊어버렸던 안식일을 기억해서 거룩하게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창세기는 다음과 같은 말로 안식일의 기원을 묘사한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 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였음이니라”창세기 2:1-3.

어떤 날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는가? 일곱째 날이다. 우리는 그 날을 어떻게 거룩하게 지키는가? 쉼(안식함)으로서. 그러면 그 외의 다른 여섯 날은 거룩하게 지킬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아니오(no)”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른 여섯 날 동안은 쉬지 말고 일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축복하시면, 거기에는 분명한 어떤 차이가 있을까? 물론 그렇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부모들은 하나님께 자기 자녀들을 축복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이 어떤 중요한 차이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믿는다. 일곱째 날은 다른 여섯 날과는 다른 날이다. 왜냐하면 그 날 속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질문을 더 해보자. 왜 하나님께서는 그 날을 축복하셨을까?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엿새 동안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며, 일곱째 날은 이 세상의 생일이요, 그분의 능하신 행위를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창조의 기념일인 안식일이 변경될 수 있는가? 절대 그렇게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기념일은 어떤 일이 성취된 사실을 그날의 근본으로 삼기 때문이다. 8월 15일은 광복절이다. 그날이 변경될 수 있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가 일본에게서 해방된 날이 1945년 8월 15일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생일도 변경될 수 없다. 그날은 여러분이 태어난 어떤 일정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지나간 역사가 여러분의 생일과 광복절과 안식일을 오랜 세월에 걸쳐서 서서히 변경시켰다면, 우리는 기만 가운데서 어떤 다른 날을 광복절이라 부르고, 또 다른 날을 안식일이라 부를 수는 있지만, 우리가 부르는 그 다른 날이 참 광복절이나 참 안식일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기 마음대로 쉬는 날을 선택하도록 하는 특권을 주신 적이 있는가? 결코 없다. 사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당신 자신의 선택으로 정하셨고 인치셨으며, 아무도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확증하셨다. 출애굽기 16장에 나오는 만나를 주시는 사건에 관련된 이야기를 읽어보자.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인 4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날이 거룩한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매주마다 세가지 기적을 행하셨다. (1) 안식일인 일곱째 날에는 만나가 전혀 내리지 않았다. (2) 주중의 평일에는 그들이 만나를 보관한 채 밤을 지새고 나면 그 만나가 썩어 있었다. 그러나 (3) 여섯째 날에는 만나를 평상시보다 두 배로 거두어서 일곱째 날인 안식일 동안에 만나를 먹을지라도, 만나는 여전히 달콤하고 신선한 채로 보존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동일한 생각을 했다. 그들은 일곱 날 중 아무 날이나 거룩하게 지켜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일곱째 날인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려고 했다. “제 칠일에 백성 중 더러 가 (만나를)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출애굽기 16:27,28.

위에 기록한 장면을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이스라엘 가운데 어떤 백성들은 다른 날을 일곱째 날과 마찬가지로 지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들이 첫째 날이나 자기들이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다른 날을 지키려고 계획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일곱째 날에 일하러 나감으로써 당신의 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꾸짖으셨다.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동일한 말씀을 하실까? 그렇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으시는 동일하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느낌과 전통과 습관에 따라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실 것이다. 야고보는 십계명중 단지 한 계명만 범해도 죄를 짓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야고보서 2:10,11.

7. 어느 날이 진짜 일곱째 날인지를 알 수 없다고요?

이 논리는, 넷째 계명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로해 주는 궤변이다. 참 안식일을 알 수 있는 네 가지 확실한 증거들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a. 성경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금요일에 돌아가셨고, 주일 중 첫째 날인 일요일에 부활하셨다.

사실상, 모든 교회들은 이 사실을 부활절 일요일과 거룩한 금요일(부활절전의 금요일)을 지킴으로써 인정하고 있다. 여기 성경의 증거가 있다. “빌라도에게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여 이를 내려서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이 날은 예비 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누가복음 23:52-53.

여기에 예수님께서 안식일 전날에 돌아가셨다는 증거가 나와 있다. 그날은 “예비일”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그날이 안식일을 위하여 예비하는 때였기 때문이다. 그 다음 절들을 읽어보자.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55절,56절. 여자들이“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는 말을 잘 유의하기 바란다. 계명은“일곱째 날은....안식일이니”라고 말하므로, 우리는 그들이 토요일을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러 옮기운 것을 보고”누가복음 24:1,2.

연속된 이 세 날에 대한 누가복음의 설명은, 우리에게 얼마나 명백하게 안식일이 무슨 요일인지를 밝혀주고 있는가? 예수께서는 일반적으로 성 금요일이라 불리워지는 예비일인 금요일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계명을 좇아”일곱째 날인 안식일에 무덤에서 쉬셨는데,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그 다음, 많은 사람들이 부활절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주일 중 첫째 날에 예수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성 금요일이나 부활절 일요일을 정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참 안식일을 정확하게 정할 수 있다.

b. 일주일의 요일들을 혼돈케 할 정도로 달력이 변경된 적이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토요일이 예수께서 이 땅에서 지키셨던 날과 동일한 일곱째 날인 것을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을 수 있다. 현재 우리들이 세계적으로 사용하는 달력은 그레고리 달력이라고 불리우는데, 교황 그레고리 8세가 1582년에 달력을 약간 변경한 이후부터 그의 이름을 따라서 그레고리 달력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레고리 교황이 달력을 어떻게 변경했는가? 1582년 이전에는 주전 약 46년에 쥴리우스 씨이저가 만든 쥬리안 달력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쥬리안 달력은 일년을 365와1/4일로 산정을 했는데, 일년은 실제로 365와 1/4 보다 11분이 모자랍니다. 그 11분들을1582년에 이르기까지 계산해 보니까 태양계와 10일의 차이가 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레고리는 요일은 변경하지 않은 채, 단순히 그 열흘을 달력에서 제하여 버렸습니다. 1582년 10월 4일은 목요일이었고, 그 다음날인 금요일은 10월 5일이 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레고리는 10월 5일 대신에 10월 15일을 사용함으로써 하늘 전체와의 조화를 꾀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일주일의 요일들에 어떤 혼동이 생겼는가? 아니다. 금요일은 여전히 목요일 다음에 오고, 토요일은 여전히 금요일 다음에 왔다. 일곱째 날은 그대로 제 위치에 남아 있게 되었고, 주일의 순환은 한치의 방해도 받지 않았다. 우리가 토요일을 일곱째 날로 지킬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4:16에서 지키셨던 그 동일한 날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according to his custom)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c. 참 안식일에 대한 세 번째 증거는 너무도 확실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시대 때부터 일곱째 날을 지켜왔으며, 오늘날도 그 날을 지키고 있다. 그들은 수천 년 동안 달력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매주마다 아주 신중하게 요일을 세면서 안식일을 지켜왔다. 그들이 요일 세는 일에 있어서 어떤 착오를 범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그들이 하루를 잃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온 민족이 한꺼번에 24시간 동안 잠을 자고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창세기에 안식일을 제정하신 이래로 안식일이 변경되었다거나 빠져버린 일은 없다.

주일의 기원은 창조의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7일의 주기는 어떤 과학적인 연구 결과나 천문학적인 이유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독단적인 계획이며, 거룩한 안식일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기적적으로 보존되어 왔다. 그것은 세상과 인간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주권의 표이며, 창조와 구속의 표이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안식일 준수를 보존하시는 이유가 아닐까? 우리는 이사야 66:22,23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새 하늘과 새 땅이 네 앞에 항상 있을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 월삭과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

안식일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너무도 귀중한 것이기에, 그분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아름다운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안식일을 영원히 지키도록 하실 것이라고 쓰여 있다. 만일 그 날이 그분에게 있어서 그렇게 귀중하다면 우리에게도 귀중한 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만일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그날을 지키게 된다면 지금도 그날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지금처럼 거짓 신들, 무신론적 진화론, 사람의 전통으로 가득 찬 시대에, 참 그리스도인들은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충성의 표와, 그분의 능력으로 인간을 성화시키는 증표인 안식일을 어느 때보다도 정확하게 드러내야 한다.

d. 네 번째 증거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100가지 이상의 언어가 토요일을 “Sabbath”(안식일)이라는 단어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토요일에 해당되는 서반아어는 안식일을 의미하는 단어로“Sabado”라는 말로 사용한다. 이것은 무엇을 증명하고 있는가? 이들 백여개의 언어가 증명하듯이 이미 오래 전부터 토요일이 안식일로서 준수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8. 안식일은 단지 애굽에서의 구원을 기념하는 날이었다고요?

이 이상한 논리는 구약 성경의 한 귀절에서부터 이끌어낸 사상인데, 안식일의 기원을 반박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논조이다. 그들이 잘못 오용하는 성경 절은 신명기 5:14,15이다. “제 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 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어떤 사람들은 이 성경 절로부터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것은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도록 주신 것이라는 이론을 전개한다. 그러나, 안식일을 제정하신 창세기의 이야기(창세기2:1-3)와 하나님 자신이 친히 쓰신 넷째 계명(출애급기 20:11)은 안식일을 창조의 기념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 두 성경 절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종”이라는 낱말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바로 앞에 있는 문장에서, 하나님께서는“네 남 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의를 주시는 말이다. 다른 말로 설명하자면, 애굽에서 종으로서 있었던 그들의 경험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의 종들에게도 안식일에 쉬도록 함으로써 종들을 공정하게 잘 대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치면서

지금까지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참 안식일이 어느 날인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왜 안식일을 만드셔서 우리로 그 날에 쉬게 하시는지, 또 안식일이 변경된 유래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어떤 독자들에게 이 책자는 충격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성령님께서 지금까지 배운 사실과 진리들에 대하여 겸손하게 순종하는 마음을 당신에게 주실 것이다.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면, 그리고 지금까지 읽은 사실들을 믿기가 어렵다면, 다시 시간을 내어 조용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책자를 두번째 읽어보기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 한 남은 백성을 가지고 계실 것이다. 성경 계시록은 그 남은 참 백성의 특징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의 게명을 지키는”(계 14:12) 자들이라고 언급한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이유를 확실히 알고, 또 그 날을 올바로 지킴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참 백성, 곧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유전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날을 순종하며 지킬 것인가? 선택은 여러분의 몫이다. 부디 하나님의 진리를 올바로 순종하며, 좁은 길을 택하여 예수님을 따라가는 독자가 되기를 바란다!

posted by Jangjaed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