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College :: 제18호 방언에 대한 진실과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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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하나님의 뜻대로 배우려 함
Jangjaedang

성경으로 돌아가는 길잡이 제18호

방언에 대한 진실과 오해

1. 트로이의 목마
트로이의 목마에 관한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전설이다. 그리이스 군대는 트로이라는 도시 국가를 10년이나 포위하였지만 항복을 받아내는데 실패하였다. 그래서 한 꾀를 생각해 내었다. 그리이스 군대는 배를 타고 후퇴하는 체 하면서 속이 비어있는 큰 목마를 전쟁의 기념비처럼 해변에 남겨두었다. 그런데 이 목마 안에는 군인들이 숨어있었다. 트로이 안에서 활동하던 시논이라는 그리이스의 스파이는 그 목마를 도시 안으로 가져옴으로 트로이가 침범 당할 수 없는 신비의 도시라는 것을 보여주라고 사람들을 꾀었다. 트로이 사람들은 그 꾀임에 넘어가 그 목마를 도시 안으로 끌고 들어왔고, 그날 밤에 시논은 목마의 문을 열어 군인들을 내어보냈다. 곧바로 그들은 트로이의 수비대를 죽이고 성문을 열었고 바다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성문 앞에 숨어있던 그리이스 군대는 트로이로 진입, 성을 함락 시켰다.

적으로부터 오는 선물은 아주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암흑의 세력은 열기만 하면 곧바로 터져 버리는, 화려한 리본으로 포장된 폭탄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데 성공하고 있다. 오늘날 사단은 "성령의 은사"라고 불리우는 목마를 이용하여 교회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교회를 멸망시키려고 한다.

나는, 기독교인이 된지 얼마 후, 어머니를 방문하기 위하여 로스앤젤레스의 팜 스프링스에서부터 히치하이크(지나가는 차에 편승하며 가는 도보여행)를 하려고 하였다. 차를 얻어타기 위하여 손을 흔들면서 한참 걸어가고 있을 때, 친절하게도 어떤 오순절파 교회 교인이 차를 세워서 나를 태워 주었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 나는 내가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 있게 들려주었다. 내 말이 다 끝나자 그 사람은 나에게 "그러면 당신은 성령을 받았습니까?"라고 물었다.

이러한 질문을 처음 받아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글쎄요, 제 생각에는...저는 확실히 하나님의 영을 내 생활을 통하여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마약을 끊었고, 도둑질, 거짓말, 욕하기... 등, 습관적인 나의 죄와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있었으니까요."라고 대답하였다.
"아니요, 그런 것들 말고 ..." 그 사람은 조금 답답한 듯이 "당신은 성령의 침례를 받았습니까? 당신은 방언을 하나요?"라고 물었다. 그 사람은 내가 어떻게 죄악의 사슬을 끊고 승리를 거두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어떠한 황홀한 극치의 경험을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 사람은 내가 기독교인으로서 반드시 소유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경험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이후부터 나는 그 사람의 표현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아직 경험하지 못하고 있던 방언"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기독교인으로서 처음 출석하기 시작하였던 교회들은 모두 오순절파- 보통 Glossolalia 라고 부르는 방언의 무아경을 믿는 - 교회들이었다. 그러한 교회의 교인들이 다 같은 방법으로 하는 방언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에도 방언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교인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서 나는 많은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을 만나볼 수 있었으며, 성령께서 실생활 속에서 이루어 놓으시는 거듭남의 경험을 인정하는 교인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와 개인적인 문제점들을 극복하는 성화의 경험에 대한 관심보다는, 얼마나 자주 방언을 하고, 얼마나 깊은 무아경의 환상을 경험하는지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예배 시간만 되면 교회는 서로 다른 방언의 소리로 꽉 찼으며,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자책하는 분위기가 깊이 깔려 있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 무엇인지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2. 초종파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방언

현대 기독교에 나타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현상 중 하나가 바로 방언을 말하는 것이다. 방언은 거의 모든 기독교에 퍼지고 있으며, 기독교뿐만 아니라 힌두교, 아프리카 토착종교, 불교, 천주교....등 거의 모든 종교계 안에서도 행해지고 있다. 비록 그들이 하는 방언의 방법은 다를지라도 자신들이 믿는 신의 능력에 압도되어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초인간적인 말을 중얼거린다는 공통성이 있다. 모든 종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현상은, 만약 현재 기독교회에서 급속하게 퍼져나가고 있는 방언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라면, 이것은 누군가가 거짓으로 조작하고 있는 속임수일 가능성이 있음을 말하여 준다. 은사는 반드시 "진리"라는 통로를 통해서만 내려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나 오류에 상관없이, 또는 누가 어떤 종교를 믿는지에 상관없이 방언의 은사가 내려질 수 있다면, 방언의 은사를 통하여 전파되어야 할 복음도 그 진실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방언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서 가짜로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방언은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다른 교인들이 방언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도 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받지도 않은 방언을 스스로 만들어서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며 자신도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무엇인가를 받아서 초인간적인 힘에 의하여 방언을 하고 있다. 그들이 기도할 때에 어떠한 힘이 그들을 제압하게 되고 그들이 생각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이상한 말을 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하에서, 그들의 마음은 평화를 느끼게 되고,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이상한 힘이 자신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성경은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신다(살전 5:19~22). 거의 모든 기독교 안에 퍼지고 있는 방언, 만약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우리는 이것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열심히 구하여야 한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진실을 증거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3. 방언의 은사가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이유

방언은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은사이다. 성경은 성령의 은사 중 하나로서 방언을 소개하고 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모든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고전 12:4~6,10~11.

방언에 대하여 첫 번째로 말씀한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막 16:15~18. 예수께서는 온 세상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할 것을 명령하시면서, 믿는 자들에게는 방언의 은사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복음 전파와 방언의 은사는 병 고치는 은사와 함께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오늘날에도 복음의 전파가 필요되므로, 방언의 은사가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내려져야 한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세 천사들의 기별은 방언의 은사를 필요로 하고 있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복음을 가졌더라" 계 14:6. 각각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족속과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방언의 은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4. 누가 누구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시는가?

방언의 은사를 내리시는 분은 누구인가? 방언의 은사를 받기 위해서는 어떤 특별한 장소에 가야만 하는가? 그것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원이나 어떤 비밀스런 장소에 가서 오랜 기간 동안 기도해야 하는가? 누가 누구에게 이러한 은사를 주시는가? 앞에서 읽어본 대로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성경은 은사의 출처를 밝히고 있다(고전 12:4~6). 4절에서는 성령을, 5절에서는 예수님을, 6절에서는 하나님을 은사의 출처로 소개하고 있다. 은사는 아버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곧 하늘의 세 분 지도자들에 의해서 내려지는 것이다. 즉 하늘의 세 분 지도자들이 은사를 내리시는데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은사를 성령의 은사라고 주로 말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하늘에 가실 때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은 은사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은사를 그리스도인에게 전하는 것은 성령이지만, 하늘의 세 분 지도자가 은사를 내리시는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안다면, 은사가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교인들이 다 같은 은사를 받을까?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교회를 몸의 지체로 비유하고 있다. 우리 몸이 팔, 다리, 눈, 코 ... 등 같이 기능이 다른 부분이 합쳐져서 일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처럼, 교회도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 12:8~10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하여 각각 다른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주신다고 증거하고 있다. 여기에 한 가지 오늘날 기독교회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누구든지 성령을 받으면 그 결과로 방언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신자들은 방언을 거짓으로 만들어 내고, 어떤 이들은 실망하여 교회를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성령의 은사를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2장 29-31절부터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확실히 증언하고 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병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그 대답은 "아니다!"이다. 다 사도일 수 없고, 다 선지자일 수 없고, 다 병고치는 은사를 받을 수 없고, 다 방언을 말할 수 없다고 바울은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 방언을 해야 성령의 침례를 받은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서적 주장이 아니다.

5. 교회에 덕이 되어야만 하는 은사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 12:31. 바울은 12장 전체를 통하여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 아버지, 예수그리스도, 성령 모든 하늘의 지도자들이 참여하여 주어지는 귀중한 은사임을 바울은 말하였다. 그런데 그는 말씀을 마치면서 이 은사들보다 더 중요하고 제일 좋은 길을 보여주겠다고 하였으며, 다음과 같이 그 제일 좋은 길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1~3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서 비밀을 말함이니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전 14:1~5
성령의 은사는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다고 말씀하셨다(고전 12:28).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는 개인의 능력을 높이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 손이 몸에서 떨어져서 스스로 일을 행할 수 없고, 눈이 몸에서 떨어져서 그 기능을 발할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인 우리에게 교회를 위하여 주시는 것이다(고전 12:27). 그런데 만약 이 은사가 교회를 돕는 일에 쓰일 수 없다면, 그 은사는 몸에서 떨어져 나온 팔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인(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인(외국인)이 되리"라고 말한 것이다(고전 14:11).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미국인들에게 한국어로 백만 번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복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알 수 없는 방언으로 자신에게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외국인이 되고 자신도 복음을 듣는 그 사람에게도 외국인이 되어서 결국 아무 쓸모 없는 일이 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고전 14:13~14. 바울은 만일 방언을 말해야 한다면, 그 말의 의미를 통역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통역하지 않고 단지 방언으로만 기도한다면 그것도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지만 그 기도의 의미가 전달되지 못하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였다. 바울이 이 성경 말씀에서 언급한 영과 마음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서에서 몸과 마음을 설명하면서 육체(몸)와 영(마음)을 서로 비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은 통역 없이 방언으로만 기도하면 나의 개인적인 소원은 올릴 수 있지만 이것이 다른 신도들에게 전달될 수 없기 때문에 교회 전체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내가 교회에 대하여 "야만인"(11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 말하였다. 영어 성경에는 "마음으로"를 "with the understanding"(이해할 수 있게)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도를 할 때나 찬미를 할 때에는 영으로도 하지만 또한 마음으로도 하여 교회의 다른 사람들도 "덕 세움을"(18절) 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말"은 곧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있는 말을 가리킨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사람이 되라"(20절).

6.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 14:22~23
성경은 "방언"을 "언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것은 실제적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마 28:19)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명령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하나 또는 두가지 정도의 언어밖에 모르는 제자들이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겠는가? 비록 제자들이 총명한 사람들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들 대부분은 교육받지 못한 문맹이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사가 필요되었다. 이것이 바로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언어를 말하게 하는 초인간적이고 신비스러운 언어의 은사인 것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새 방언을 말하며" 막 16:17. 이 성경절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 "방언" 또는 "언어"는 하나의 "표적"으로서 외국어를 공부하지 않고도 그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됨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전에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언어로 유창한 설교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경에는 방언을 말한 예가 3번 나온다 (사도행전 2, 10, 19). 이 성경절의 예를 잘 살펴보면 방언의 은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1~4

"불"은 능력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방언의 은사를 불의 임함처럼 보여주심으로써, 애굽의 바로 왕 앞에 나아갈 때에 모세가 받았던 그 능력에 (출 4:10~12) 상당하는 능력과, 이사야의 혀에 닿았던 하늘에서 온 숯처럼(사 6:6,7), 그들의 연약한 혀에 하늘의 능력이 내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왜 하나님께서는 방언의 은사를 내리기 위해서 오순절까지 기다리셔야만 하셨을까? 사도행전 2장 5~11절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리비아인 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오순절은 유대인들의 명절로서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이다. 이 날은 로마 제국의 곳곳에 퍼져있는 모든 진실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예루살렘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 하나님께서는 이 날을 택하셔서 방언의 은사를 제자들에게 내리심으로써, 그 곳을 방문중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모국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계획하셨다. 이 성경 말씀에 따르면 적어도 15개 이상의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자들에게 내려진 방언의 은사로 인하여, 타지에서 살다가 오순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개심의 경험을 하게 되었고, 오순절을 보낸 후 그들은 제자들이 전한 새로운 복음을 가지고 고향 집으로 돌아갔다.

이 말씀은, 방언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에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언어의 장벽을 허물기 위하여 내리는 은사임을 확실하게 증거해 준다. 어떤 사람들은 오순절 날에 있었던 기적이 다른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것이었다고 오해하고 있다. 이 은사는 다른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은사가 아니었고, 다른 언어를 말할 수 있는 은사였다. 이것은 언어의 은사였지, 들음의 은사가 아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방언이 "하늘의 언어"로서 오직 하나님과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과 듣는 사람들이 모두 그 설교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11절).

두 번째 예는 베드로가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에게 전도한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행 10:44~46. 사도행전 10장 1절에 보면 고넬료는 이태리 사람이었고, 베드로는 유대인으로 아람어를 사용하였다. 역사에 의하면 로마의 시종들은 여러 나라에서부터 잡혀온 사람들이었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났을 때, 그 두 사람 사이에는 언어 장벽이 있었음이 확실하며, 베드로는 아마 통역관을 세워서 통역을 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령이 고넬료와 그 집안 사람들에게 내려졌다. 그 결과, 그 곳에 있던 유대인들과 베드로는 그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성경은 유대인들이 그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말하는 "하나님을 높임"의 음성을 들었다고 적고 있다(행 10:46). 후에 베드로는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오순절날)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행 11:15) 하였다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통하여 고넬료와 그 집안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오순절날 받았던 동일한 방언의 은사를 받았었다고 밝히고 있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방언의 은사를 받은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은 그들이 전에 전혀 알지 못하던 다른 언어로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방언에 관한 마지막 예로는 바울이 12명의 에베소 사람들에게 전도한 일이다. 사도행전 19:6절에 말하기를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많은 교육을 받은 사도였으며, 가장 많이 선교 여행을 하였던 사람이다(고전 14:18). 성령이 12명의 에베소 사람들에게 임하였을 때에 바울은 그들이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로마 제국에서 쓰이고 있는 언어를 말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야 전도하는데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이 성경말씀들을 통하여 방언의 은사는 여러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 그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내려진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 4장에는 2장에 나오는 오순절과 유사한 장면이 나타나 있지만, 방언의 은사는 내려지지 않았다. 그들이 모였던 장소가 흔들렸으며 사람들은 성령으로 감동되어졌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다른 언어를 쓰는 외국인들이 없었기 때문에, 방언의 은사는 내려지지 않았다. 사도행전 4:31절에 말씀하시기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하늘로부터 성령의 침례가 내려지는 이유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가 아니고, 전도하기 위한 능력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고 하신 것이다.

7. 고린도 교회에게 한 바울의 충고

바울이 기록한 14권의 신약 성경책들 중에서 고린도전서만이 방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는 어떤 특별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왜냐하면 고린도후서나 바울이 기록한 다른 성경에는 방언에 대하여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 고린도 도시에는 두 개의 유명한 국제 항구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여러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고, 예배의 방법에 있어서도 혼란이 생기게 되었다. 고린도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언어로서 기도하고, 증언하고, 설교를 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바울은 조언하기를 만약 다수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말한다면 통역관이 필요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조용히 있으라고 말한 것이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조용히 하고 자신과 하나님께만 말하라" 고전 14:28. 즉,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하는 것은 예의있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바울의 다음과 같은 분명한 충고를 들어 보라: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들로만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교리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슨 유익을 주겠느냐? 피리나 하프같이 생명이 없는 것일지라도 소리를 낼 때에 그 소리를 구별하지 아니하면 피리를 부를 것인지 하프를 타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으리요? 뿐만 아니라 만일 나팔이 불확실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 준비를 하겠느냐? 너희도 마찬가지라. 만일 너희가 방언으로 쉽게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이는 너희가 허공에다 말하고 있는 것이라 ..... 교회에서 일만 마디의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기 보다는 차라리 나의 지각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여 나의 말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기를 원하노라 .... 누가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려면 두 사람이나 많아도 세 사람이 차례로 하고 한 사람은 통역하라. 그러나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조용히 하고 자신과 하나님께만 말하라" 고전 14:6-9, 19,27,28(킹제임스 성경역)

소위 방언을 한다는 사람들이 이 성경절들을 이용하여, 교회에서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중언부언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바울의 충고는 그러한 사람들의 주장과는 전혀 다르다. 디모데전서 6:20절에 "허황된 말과 변론을 피하라"고 하였다. 디모데후서 2:16절에 바울은 또다시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니"라고 하였다. 방언의 은사는 우리의 생각을 언어가 다른 다른 사람과 나누기 위해서 마련된 하나님의 고안품이다. 만약 사람들이 그대가 하는 방언을 이해지 못한다면, 바울의 충고처럼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지 않을까?

8. 하늘의 언어

내가 알고 있는 오순절파 교회에 있는 대부분의 나의 친구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이 실제적인 다른 나라의 언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나라의 언어를 말하는 것 이외에 두 번째 은사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하늘의 기도 언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groanings which cannot be uttered)"이라고 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도하는 이유는 사단이 자신들의 기도를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우리의 기도를 숨기라는 말씀이 없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사단이 그것을 듣고 떤다고 말하고 있다.

오순절파 교인들이 말하는 소위 "기도의 언어"라고 불리우는 교리는 고린도전서 14장 14절에 기초하고 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들은 바울이 기도할 때에도 하늘의 언어로 기도하였으며, 바울 자신도 무엇을 기도하는지 알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중요한 문제를 제시한다. 만약 자신이 어떤 기도를 했는지 알지 못한다면, 자신의 기도가 응답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고린도전서 14:14절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성경을 읽다가 가끔 문제에 부닥치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의 성경절들이 고어를 쓰고 있어서 그 의미가 혼란스럽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 성경절을 현대어로 표현한다면 "내가 만약 내 주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한다면, 내 개인적으로는 성령을 통하여 기도하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기도를 통하여 전달되는 나의 생각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라는 뜻이다. 바울은 만약 우리가 크게 공중 기도하기 원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하든지 아니면 잠잠하라고 말하는 바울의 충고를 기억하라.

그 다음 몇 성경절들을 살펴보자.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고전 14:15~16. 이 성경절에 의하면 누가 이해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하였는가? 이해하는데 문제가 있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이 아니고, 듣는 사람이다. 만일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외국인과 같이 기도를 해 본 경험이 있다면 바울이 왜 "아멘" 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하였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통역관이 없다면 여러분이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4장의 문맥을 볼 때에 방언을 말하는 이유, 또는 외국어를 말하게 되는 이유는 복음의 전파를 위한 의사소통과 그로 인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만약 통역관이 없다면 그 사람의 말은 단지 허공에 대고 하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과 그 사람 자신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주 잘못 오해되고 있는 2절의 말씀의 의미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고전 14:2

바울은 다시 한번 강조하기를 방언은 듣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과 묵상으로 이야기하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고전 14:9, 28. 분명, 방언은 언어 장벽을 극복하여 복음을 다른 민족과 나라에게 전하기 위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주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같이 묻는다. "바울은 자신이 천사의 언어를 말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다.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고린도전서 13:1)라고 하였다. 만약 여러분이 이 말씀을 문맥을 따라 이해한다면, "... 할지라도"의 의미가 "만약 그렇게 한다고 할지라도"라는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예로서 바울은 2절에서 "... 할 수 있는 믿음이 있을 지라도"라는 동일한 방식의 문맥을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참수형을 당하였지 화형을 당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이 "...할지라도"의 의미는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9. 위조품을 조심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본이시다. 그분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한 분이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한번도 방언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침례 요한도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이었으나 그가 방언을 말하였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신약의 27개 책들 중에서 오직 3권만이 방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성경은 약 39명의 저자로 쓰여졌으나 오직 누가, 바울, 마가만이 방언에 대하여 말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곳에 우리의 중요성을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감정에만 의지한다면 우리는 진품과 위조품을 구별하지 못하고 헛된 방언을 구하다가 믿음을 잃어버릴 것이다.

진정한 방언의 은사는 복음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 강력한 능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단은 언제나 위조품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Glossolalia"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오순절파 교회들에서 방언의 경험을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American Heritage 사전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복잡하고 의미 없는 말, 특별히 무아경 또는 정신질환적 증상과 관련된 현상"

이와 반대로 "언어"라는 단어는 "인간이 사용하는 목소리, 주로 성문화된 글씨로 나타내는 소리,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구성된 패턴" 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성경은 방언을 언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Glossolalia"라는 분열된 소리는 "언어"가 아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많이 보아왔다. 전에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목사와 그의 아내가 "방언의 팀"을 이루고 있었다. 매주 설교 시간만 되면 목사의 부인은 벌떡 일어서서 그의 손을 하늘로 쳐들고 황홀경에 빠진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부인은 언제나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여 내었다. "한다 칼라 샤미, 한다 칼라 샤미....". 이러한 현상은 나에게 의심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매번 그 부인이 이러한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마다 그의 남편인 목사는 설교를 중지하고 영어로 통역을 하였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사실은, 그 부인은 계속해서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데, 남편인 목사가 통역하는 내용은 매번 달라지는 것이었다. 때로는 통역이 부인의 이상한 소리보다 3배 이상 길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싶은 기별이 있으면, 왜 처음부터 전체 교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로 주지 않으실까?' 하고 의아해 하였다.

10.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현대 기독교회 안에서 급속하게 퍼져나가고 있는 이상한 방언 현상을 볼 때마다 나는 학창 시절에 읽었던 역사책의 내용이 생각난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상한 방언 현상은 그 뿌리를 성경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 이방인들의 제사 의식에 두고 있음을 역사는 말하여 준다. 기원 전 6세기에, "델피의 오라클"이라는 사람은 아폴로신과 뮤즈의 신의 영지라고 알려진, 그리스 중부에 있는 파르나소스산 아래 살고 있었다. 델피는 "술, 다산, 선정적 춤의 신"이라고 부르는 "디오니소스"를 믿는 사람이었다.
제사 의식 중에 분위기를 돋우는 선정적인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을 때, "피디아"라고 부르는 부족의 사제장은 이상한 연기를 들여 마시면서 황홀경에 빠져들어 가면서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여 지절거렸다. 그 사제가 이상한 소리를 낼 때에 다른 사제는 그것을 통역을 하였다. 그의 소리는 아폴로신에 관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추상적인 것이었고 그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New Mexico에서 미국 인디언들과 살고 있을 때에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목격하였다. 그 인디언들은 "페이요우티"라는 환각제를 마시고 둥글게 앉아서 몇 시간 동안이나 드럼 소리를 들으며 종교적 노래를 불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몇몇 인디언들은 발작적으로 자극적인 몽상에 관한 말을 중얼거렸다. 이러한 제사 형식의 유사함 때문에 미국에서 오순절파 교회들은 미국 인디언들에게 인기가 가장 좋은 곳이 되었다.

여러가지 이교도적 미신을 믿는 아프리카의 부족들은 그들의 신으로부터 축복을 받아내기 위하여 닭이나 염소 등을 제물로 드리고 여러 시간 동안 불을 중심으로 돌며 춤을 추며, 최면적인 리듬과 드럼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몇 사람들은 신접한 상태에 이르게 되고 혼령의 세계의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 마을 마법사나 사제가 그 말을 통역한다. 이러한 의식은 오늘날에도 서인도의 Voodoo Catholic 들에 의하여 행하여지고 있다.

이러한 이방적인 제사의식들이 처음 미국 교회에 들어온 시기는 1800년도이다.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노예들이 미국에 온 후 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강압받아서 교회에 나갔지만, 그들은 스스로 성경을 읽어서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지성을 갖추지 못했다. 그들이 비록 아프리카의 서로 다른 부족들에 속해 있었지만, 그들 모두는 신령적 춤과 신접한 소리를 낸다다는 점에 있어서는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 노예들은 그들의 신접한 소리를 방언의 은사로 오해하게 되었고, 새로운 방법의 방언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강한 리듬의 음악과 같이 진행되는 이러한 광신적 의식은 미국 남쪽 지방의 교회들에서 처음 받아들여졌으나, 당시의 기독교 단체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Holy Rollers"라고 비난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접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의식도중에 독사를 가지고 나왔다. 이러한 생각은 마가복음 16:18절에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을 잘못 오해하였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독사를 사냥하여 들고 있는 것은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가 아니고 실제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백인들의 오순절파 운동은 1906년 로스앤젤레스의 Azusa Street에 있는 Apostolic Faith Gospel Mission에서 시작되었다. 이 단체의 지도자는 William Seymour 이라는 흑인 전도사였다. 그 때부터 이 단체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교리를 계속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일반 기독교인들에게 더욱 흥미 있게 보이도록 노력하였다. "1960년대부터 이 오순절파 운동은 전통적인 백인 기독교인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전 세계에 걸쳐서 개신교와 천주교 안에 오순절파의 가르침을 믿는 수백만의 교인들이 있다." Compton's Interactive Encyclopedia, under the entry "Pentecostals"

무아경의 주문을 외우는 이방 종교의식에서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것을 모방한 거짓 방언들은 이방 종교의 음악을 모방한 기독교회의 음악과 종교의식에서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 반복되는 비정규적인 리듬의 연주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성적인 능력을 잃게 만들고 최면적인 무아경으로 이끈다. 이러한 분위기를 통하여 극렬한 상태로 반복되는 중얼거림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지금 사단은 위조된 방언의 은사를 사용한다. 트로이의 목마처럼, 이방 종교의 예배 방법이 기독교 안에 들어와서 놀라울 만큼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사단은 기독교인들을 믿음에서 감정으로 이끌려고 한다. 어떤 오순절파 교회들은 성경은 이미 지나간 구식이고, 방언이 바로 그리스도인에게 새롭게 주어진 기별이며, 심지어는 방언이 성경보다도 더 믿을만한 것이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현대 기독교회 안에 사단을 위한 무대가 이러한 단계까지 완성되어 있다.

11. 성령이 임한 사람의 태도

"영의 침을 당한 사람은 땅에 뒹굴며 방언을 중얼거려야 한다"는 사상은 하나님의 신을 모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목적은 그의 형상을 복원하기 위해서이지, 인간의 존엄성을 잃게 하고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이성을 잃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구약시대에 갈멜산에서 이방신의 예언자들은 제단 주위를 뛰며 신음소리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예언을 하면서 자신들의 몸을 자학하였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엘리야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단순한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고전 14:33. 우리가 성령을 받을 때, 우리 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는 생각은 성경 말씀과 어울리지 않는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고전 14:32. 예수께서 갈릴리 맞은 편 거라사인의 땅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셨을 때에 그 고침을 받은 사람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아래 앉"아 있었다(눅 8:35). 하나님께서는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초청하신다.

이 글을 읽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당신은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나는 여러해 동안 방언을 하였고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알고 있습니다"라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느낌으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사단은 우리의 감정과 느낌을 통하여 접근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되어야 한다.

방언을 자주 하였던, 열심 있는 오순절파 교인인 나의 한 친구는 방언에 관하여 공부한 후 자신의 방언이 정말로 올바른 영으로부터 왔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진정한 마음으로 "주여 만약 이것이 당신의 뜻이고, 만약 내가 참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면 이것을 내게서 제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그가 내게 말하기를 그 시간으로부터 무아경의 중얼거림은 다시 그에게 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생각과 행함들을 하나님의 제단 위에 올려 놓고 포기할 줄 알아야 하며, 이것들이 어떠한 인기를 가지고 있거나,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좋아하는지에 상관없이 진리의 말씀에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것들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눅 16:15.

12. 기적이 모두 성령의 역사는 아니다.

성경에 계시된 가장 분명한 마지막 시대의 징조 중의 하나는, 모든 영혼들의 운명을 종결지을 최후의 전쟁을 위해서, 사단의 세력이 가시적으로 출현하는 것이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사단은 세상 전체를 자기 진영으로 끌여 들이는 기만적인 작전을 펼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도 요한은,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 내려갔"다고 기록했다(계 12:12). 지구 역사 전체를 통하여 준비해온 이 마지막 전쟁을 위해서, 사단은 정치적 세력과 종교적 힘을 모두 이용할 것이다. 머리가 비상한 사단은 사람들을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전략을 세워왔다. 그의 최종적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늘에 가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이 계속해서 율법을 범하는 죄를 짓게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이 최후의 기만을 위한 그의 전략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의 권위에 도전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모든 교파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범하면서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하며, 둘째로는 하나님의 뜻 안에 살고 있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행하는 기적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강력한 감정적 확신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단은 신앙 문제에 있어서 성경을 최종적인 권위로 받아들이던 전통적 견해를 무너뜨리고, 그에 걸맞는 다른 권위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사단은 모든 교파 간에 존재하는 어떠한 종류의 견해 차이도 극복할 수 있는 전략을 세웠는데, 그러한 전략을 통하여 사단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전체 그리스도인들을 유도하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주님께서 주신 이 경고의 의미를 잘 생각하여 보자. 이 성경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자처하고 있으며 심지어 예언하고 병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엄청난 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그런 영적 은사들을 행사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누가 그들에게 이러한 초자연적 능력을 주어서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있도록 하였을까? 그러한 능력이 나올 수 있는 근원은 오직 하나님과 사단 이외에는 없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들이 불법의 창시자 사단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고 예언했던 것임에 틀림없다.

이 말씀은 마지막 때에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처럼 보이는 기만적인 기적들이 있을 것임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외부적으로 그것들은 정말 참된 은사와 유사하게 보일 것이며, 신앙적 열성이 충만한 분위기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질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요한복음 16:13)라고 하셨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모든 진리 또는 모든 것"은 죄를 지적하시는 성령의 사업부터 시작된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어떤 사람도 자신이 율법을 범한 일에 대한 성령의 책망을 받고 십자가로 인하여 용서와 성화의 경험을 하지 못한다면, 진짜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할 수 없다. 거짓말, 도둑질, 간음.... 등을 행하면서도 성령 충만함을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아니라 참람된 요구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 12:31,32. 사도 누가는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원칙에 대해서 분명하게 선언하였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행 5:32.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신다.

이 성경절들을 통하여 우리는 왜 기적을 행하였던 자들을 예수께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배척해 버리셨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늘의 능력을 요구하였지만, 하늘 아버지의 뜻과 그분의 율법을 거절하는 삶을 살았으므로,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하고, 사단의 속임을 당한 것이었다.

성령의 은사를 구하기 전에, 성령의 9가지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자신의 성품과 생애 속에 충만하게 맺히고 있는가 생각하여 보자. 성령의 열매들이 충만하게 맺히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성령의 능력이 부어질 수 있다는 것은 사단의 속임수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진리를 고의적으로 부인하거나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능력과 은사가 내려질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부인하는 사람도 성령의 침례를 받을 수 있다면, 어떤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받을 수 없겠는가?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그것을 받아서 이기적으로, 무례하게 사용할만큼 변화되지 않은 자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방언이 신앙적인 만족감을 주기 위하여 내려진다고 생각하는가? 한국 사람이 한국 청중들에게 설교하는데, 방언을 사용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한국 사람이 한국사람들에게 설교하는데 통역을 두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방언을 하는 사람 자신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며 듣는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묘한 상황이 성경적으로나 합리적으로 납득이 되는가?

그대는 하나님의 기적을 간구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진리를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는가? 그대는 예수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진리와 계명을 사랑하고 순종하는가? 그대 자신의 신앙적인 경험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그대는 자신의 경험을 부인할 만큼 성경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가?

방언은 현대 기독교회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꼭 필요한 은사이다. 만약 그대가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느낀다면, 그 은사를 주장하기 전에 기도와 성경연구를 통하여 그 은사의 진실성을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이다.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가 있는 것처럼, 거짓 방언과 참 방언이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의 진실성은 성경으로 판단되어져야 할 것이다

13.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진짜 방언 인가요?

1800년도에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온 노예들이 기독교회 교인이 되도록 강요 당하면서, 그러한 교인들이 예배 도중에 이상한 소리들을 발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출발한 방언 운동이 이제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은 거의 모든 기독교회의 교파들이 예배시에 방언을 허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집회에 참석하는 분들이 내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여 오는 일들은 꽤 흔한 경험이다. "목사님! 방언을 해야만 성령을 받은 증거 입니까?", "어떻게 해야 방언을 유창하게 할 수 있나요?", "교회에서 방언하는 것이 성경적입니까?",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진짜 방언인가요?".

방언이란 문자 그대로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서로의 의사를 소통하기 위하여 말하는 체계적인 언어말이다. 요한 계시록 14:6 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 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여기에서 방언이란 외국어를 말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언어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린도 전서 12:10 의 말씀 중에 이러한 말씀이 있다.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을 통역함을 주시나니." 여기에서도 방언이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외국어를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요즈음에는, 방언이란 개인이 하나님께만 말하는, 이상한 알아 들을 수 없는 소리냄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일까?

성경에 원래 말씀된 방언의 은사의 내용과 그 종류가 심각하게 오해되어 버리고 만 것 같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신약 시대의 첫 방언의 경험인 오순절의 방언도 외국 각 나라들에서 몰려온 사람들에게(이민간 유대인들)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알아들을 수 있게 나타난 성령의 은사가 바로 방언의 은사였던 사실을 우리는 간단한 성경 연구로 알 수가 있다. 외국에 살다가 우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여 온 사람들이 별로 배움이 없었던 제자들의 설교를 자기들의 방언(외국어)으로 알아 듣게 되자 다 놀라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떨게 해서 이 성경의 방언이 현대에 와서는 알아 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들을 발하는 것으로 둔갑을 하게 되었단 말인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오랫동안 방언을 해 왔었다는 한 자매가, 하루는 자기의 방언의 경험이 성령의 가장 큰 증거인 성품의 변화에는 어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다. 감정적으로 흥분된 상태를 주거나 짜릿한 고조의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나 실재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일에는 속수 무책이었고, 오히려 느낌에 의존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교인들은 옆에서 남들이 방언을 하면 자기도 무엇인가를 하여야 하기 때문에 일부러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들을 만들어 내어 지껄여 왔다는 간증들은 그저 웃고 지나가야 할 일만은 아니다.

예수께서 곧 오실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교인들로서,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모든 진리들을 성경을 가지고 시험해 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성경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른다고 할지라도 단연코 버려야 하는 것이 하나님께만 충성하는 믿음이다. 만일 오늘날 흔히 하고 있는 방언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과 맞지 않는 경험이라면 그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경험이 아니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성령이 주시는 경험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른 영에게서 오는 일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14. 사단의 공격 목표는 감정
사단의 공격 목표는 감정

성경 진리에 의존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감정에 의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단은 기적과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하여 사람의 감정을 집요하게 공격한다. 느낌과 감정에 의존하여 신앙 생활을 영위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아무런 보호벽도 가지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단은 사람의 정신을 흥분시키고 자극하는 방법으로 오류와 거짓을 퍼트리기 때문이다. 진리 안에 존재하는 참된 행복과 만족을 발견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헛된 감정적 환희를 추구하다가 사단이 만들어 놓은 덫에 걸려 들게 된다.

사단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감정과 믿음을 섞어 놓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므로 감정이 고조되어야만 믿음의 향상과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사단의 전략에 기만당하기 매우 쉬운 형편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사단은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성품과 생애에 있어서 아직 충분하게 열매 맺지 못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각종 기적과 거짓 은사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줌으로써, 그들의 고조된 감정을 통하여 접근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고조된 감정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신과 특별하게 함께 하신다는 거짓 확신을 갖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변화가 아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어떤 단조로운 말을 빠르게 반복하여 기도함으로써, 이전에 자신이 경험했던 감정적 환희와 만족을 억지로 이끌어 내려고 애쓰지만, 그들의 생애를 이끌어 가는 진리와 신앙의 원칙이 교정되지 않는한 진정한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새롭게 거듭난 생애도 시작될 수 없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이 감정적으로 만족되지 못할 때마다 깊은 낙담을 맛보게 된다. 그들은 사단에게 속은 것이며, 또한 스스로의 감정에게 속은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영적 경험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 이상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15. 감정적 신앙의 특징

감정적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매우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분명하게 밝히신 뜻과는 달리 그와 반대되는 길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억지 기도를 드리는 것이야말로 감정적인 신앙의 대표적 증거이다. 사단은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여 의심을 받지 않을만한 곳에 그물을 치기 때문에 정직한 마음으로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지 않는 한, 누구도 사단의 덫을 피할 수 없다.

대개 감정을 중요시 여기는 신앙은 하나님의 진리와 율법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내게 개인적으로 말씀해 주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그대로 가겠다" 라고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사단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이 원하는 감정과 느낌을 줌으로써,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켜 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가 요구하는 바를 저버리고, 자신의 감정과 느낌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생애함으로써 결국에는 자기 스스로를 속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표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와 교만이 죽은 생애이며, 자신보다 진리를 높이 여기는 삶이다. 분명하고 예리한 성경 진리를 받아들이기 원치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명백한 진리 대신에 자기의 양심을 진정시키고 감정을 만족시켜 주는 설교를 좋아한다. 극기와 자아 희생을 요구하는 그리스도의 진리가 빠져 있는 교리에 큰 호감을 나타내는 것이 감정적 신앙인의 특징이다.
느낌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우리의 생애이다.

16. 믿음이 필요되는 순간

모든 것이 예상대로 잘 진행되고, 모든 일이 잘 풀려 나갈 때에는 믿음의 참된 가치가 드러나지 않는다. 믿음은 주변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나갈 때에 진정으로 그 가치가 발휘된다. 모든 것이 원만하고 평화로울 때에는 참된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상황이 변해서 모든 것이 악화될 때에는 참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높이 드러나게 된다. 자신의 감정이 잘못된 것을 요구할 때, 자신의 느낌이 건강에 유익하지 않는 음식을 요구할 때, 그리고 자신의 육체가 정욕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달라고 외칠 때에 참된 믿음은 그 모든 것을 거절하고 승리한다.

믿음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감정적 신앙을 가지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이 자신에게 많이 부어질 때에는 큰 믿음을 얻게 되며, 자신이 성령의 큰 능력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에는 아무런 믿음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령의 결핍을 느낄 때야말로 믿음을 활용해야 할 때이다. 짜증과 속상함이 치밀어 오르고, 허전함과 외로움이 밀려올 때야말로, 우리가 믿음을 발휘하여 하나님께 구조의 손을 뻗칠 때이다. 시커먼 검은 구름이 마음을 덮쳐올 때야말로 산 믿음을 통하여 흑암을 꿰뚫고 구름을 흩어 버림으로써 암흑 저편에서 여전히 나를 바라다 보고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쳐다 보아야 할 때이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인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하는 축복을 주장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는 말씀의 의미이다(요 15:7).

posted by Jangjaed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