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College :: Bible College

  • total
  • today
  • yesterday

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01-05 20:58
블로그 이미지
성경을 하나님의 뜻대로 배우려 함
Jangjaedang


제1부 : 십자가의 숨겨진 의미


서론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워털루 전투에서 비참하게 패배한 나폴레옹은 실패로 끝난 전략의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지 분석하기 위해서 그의 지휘관들을 소집하였다고 합니다.

한참 토의가 진행되는 도중, 작달막한 키의 나폴레옹 장군은 여러 색깔로 표시된 지도 위의 영국을 가리키며 비통한 듯이 말했습니다. 이 빨간 지점만 아니었으면 내가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이처럼 사단도, 옛 예루살렘 성문 밖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십자가를 가리키며 똑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의 손아귀에서 이 세상을 구원해 낸 갈바리의 붉은 지점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으시렵니까?

그것은 이 지구성의 운명을 종결지은 장소요, 치열한 투쟁의 장소이었습니다. 사단은 그 후부터 이미 패배한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필사적인 전투를 하였지만, 거기서 결정적 패배를 당함으로써 영원히 다시 일어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우리는 그분께서 싸우신 싸움, 그분께서 당하신 고난과 죽음이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해 희미한 이해밖에 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서 그분의 희생의 참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사단에게 협력하고 굴복하는 비참한 일은 없게 될 것이며, 우리는 연약한 상태에서 벗어나 훨씬 더 담대해지고 용감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인간의 언어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과 대속의 죽음의 신비를 설명하고자 애썼습니다. 가끔 우리는 그들의 영감적 증언을 읽으며 흐느끼곤 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어렴풋한 이해를 통해서도, 우리의 마음이 감동됩니다. 영원한 세월을 두고서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에 대하여 연구할지라도, 우리는 이 주제를 겉핥기식으로밖에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5-8). 이 장엄한 표현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에서 마굿간으로, 그 다음에는 십자가까지 내려오신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을 적절히 묘사할 알맞는 예화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종종 우리는 그분의 희생의 정도를 묘사하기 위하여 가상적인 예화를 들기도 합니다. 한 무리의 개들이 병에 걸렸습니다. 헌데가 더덕더덕 나고 고름이 줄줄 흐릅니다. 한 인간이 자신을 낮추어서 개가 되어 준다면, 그 모든 개들이 임박한 죽음으로부터 건짐을 받을 수 있다고 가정합시다. 우리 가운데 자진해서 인간의 신분을 버리고 말 못하는 천덕꾸러기 개로 자신을 낮출 사람이 있을까요? 그럴듯한 이야기처럼 들리긴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굴욕을 나타내 보이기에는 너무도 빈약한 예화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오셔서 정죄 받고 죽을 수밖에 없는 아담 가족의 일원이 되시기 전에 가지고 계셨던 왕의 자리를, 그리고 그분께서 버리셨던 영광의 위치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속죄(Atonement)를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사건을 그냥 지나쳐 버리고 있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셨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분께 대하여 감사하는 생애를 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크게 투자한 것에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무심할 정도로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저는 전도집회를 끝내고 한 사람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밤마다 집회에 잘 참석했는데도 불구하고, 결심을 하지 않은 사업가였습니다. 우리는 지난 4주 동안 서로가 꽤 친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가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기 위해서 그를 찾아간 것입니다. 그는 한 번도 복음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저의 부드러운 질문을 받자,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전혀 들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김 선생님! 당신이 오늘밤 죽는다면 영생을 얻을 희망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고백해본 적이 전혀 없답니다.

너무도 냉담한 그의 태도에 놀란 저는 심각하게 물었습니다. 김 선생님, 만일 당신이 오늘 저녁에 마을 사람 10명의 사인을 받아오기만 하면, 내일 은행에서 천만 원의 돈을 당신에게 준다고 가정합시다. 그렇다면 마을을 다니면서 10명의 사인을 받아오시겠습니까? 물론 하고 말고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서류에 한 사람의 사인을 빠뜨려서 천만 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일은 없으시겠죠? 천만에요. 꼭 받아야지요. 그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지요.

김 선생은 구원이 정말 좋은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더욱 친절히 그에게 말했습니다. 김 선생님, 당신은 오늘과 내일 사이에 천만 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왜 오늘 밤에 죽으면,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되는데, 그것은 상관없다고 말씀하십니까? 영원한 생명보다 돈에 더 귀한 가치를 두시는군요. 당신의 평가 기준은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치러진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그렇게 가볍게 취급 하실 리가 없습니다.

김 선생과의 대화를 통하여, 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그토록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틈에서 생활하였고, 수없이 많은 설교를 들어오긴 했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하나의 순교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예루살렘 근방에서 십자가 형을 받았던 수많은 순교자들의 죽음과 유사한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나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다른 순교자들의 죽음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매질을 당하고, 못 박히고, 창에 찔리는 고통과 같은 신체적인 고통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극심하게 매질을 당하거나 못 박힌다고 해서, 그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뇌에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달랐을까요?

그분께서는 어떤 종류의 죽음을 당하셨을까요? 성경은,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히브리서 2:9)셨다고 말합니다. 잠시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분은, 나의 죽음을, 여러분의 죽음을,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끝 날에 우리 자신들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에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의 신비와 경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첫 번째 사망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둘째 사망을 대신 경험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둘째 사망을 경험하심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의 차이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허용하셨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사들도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그리스도를 돕도록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그가 세상에서 가장 악한 죄를 지은 것처럼 취급되어야 했습니다. 그 무거운 죄 짐과 정죄 아래 짓눌려서, 그는 굵은 핏방울을 땀처럼 흘리시고 마침내 땅을 향해 머리를 떨구셨습니다. 골고다의 언덕에서, 그는 아버지 하나님의 가납하시는 면전으로부터 차단된 채 괴로움에 울부짖으셨습니다.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46).

여러분은 김 선생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는 십자가의 참된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구원을 위해서 치러진 대가가 어떠한 것인지를 올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김 선생이 깨닫지 못했으며,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올바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는 그 십자가의숨겨진 대가를 함께 찾아보십시다.

바울은,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로마서 5:12)고 했습니다. 바울의 말에서 우리는 몇 가지 의문점을 갖게 됩니다. 오직 한 사람만이 죄를 지었는데 왜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합니까?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대신 형벌을 치러야 합니까? 아담이 에덴 동산에 있을 때, 그는 세상에 태어나게 될 모든 사람을 대표한 것입니다. 인류의 시조로서, 그는 마치 자신이 모든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사실 거기에 있었던 것과 마찬 가지입니다. 아담의 형상을 닮은 자손들이 태어났는데, 그들은 아담의 유전인자와 염색체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아담의 몸과 마음을 이어받았습니다.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그들이 받은 영향을 자신들의 후손들에게 똑같이 전수하였습니다. 아담은 우리의 조상이며, 아담 안에는 세대마다 되풀이 되는 유전 법칙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아담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것이 자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 한 시험을 두셨습니다. 그 시험은 단순하고 직접적인 것이었습니다.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시험이었습니다. 우리는 동산 중앙에 있던 나무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세기 2:17). 아담이 계속해서 그 완전한 에덴 동산의 환경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느냐의 문제는, 그의 순종 여하에 달려 있었습니다. 아담의 행복한 미래는 금지된 나무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할 경우, 형벌을 제하거나 가볍게 하기 위한 어떠한 대책도 없었습니다. 시험은 분명했습니다. 순종하여 살든지, 불순종하여 죽든지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아담의 나이 930세 때에, 그 선고는 집행되었고, 그는 결국 죽어서 땅에 묻혔습니다.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죄로 인하여 더러워진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단지 조상들이 물려주는 것만을 가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모든 사람들은 죄되고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조상들의 죄의 책임(guilt)을 물려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범죄한 아담으로부터 물려 받았던 것은 약해지고 죄를 좋아하는 본성이었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의 죄에 대한 책임을 떠맡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죄 자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아담이 지은 죄의 결과 즉, 죄로 인해서 도덕적, 정신적으로 연약해진 육체를 물려받았던 것이지, 아담이 범죄한 죄 자체를 전수 받은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아담의 후손들에게 있어서 원죄(original sin)라는 것은 전혀 해당되지 않는 단어입니다.

죄의 결과로 인하여 연약해진 육체를 타고나는 아담의 후손들은 아담처럼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아담의 죄로 인해서 받게 되는 형벌이 아닙니다. 그들(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유전 법칙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는 본성(Mortal Nature)을 전수 받았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그들의 죽음은 아담이 후손들에게 물려준 퇴화된 육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죽음은 자신의 죄에 대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죄는 세상에서 움직일 수 없는 요지부동한 존재가 되었고, 모든 인간은 한 번은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모든 사람들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으로 끝날 뻔하였습니다. 아담의 생명은 그가 범죄했을 때에 이미 끝났습니다. 첫 번째로 주어진 생명이 시험에 굴복함으로써 끝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그에게 주신 생명에 대한 모든 희망은 끝났습니다. 이제, 죽음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영원한 죽음- 만이 아담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후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셨다면,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는 그것이 끝이 되었을 것입니다.


인류에게 둘째 기회가 주어짐

그러나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는 즉시 여자의 후손(창세기 3:15,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함)을 통한 구속의 경륜을 발표하시고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두 번째 기회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형벌을 대신 짊어지시고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배려를 통하여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첫 시험에 실패한 결과를 변경하거나 없애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엄숙한 질문을 던집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첫 번째 실패에 대한 형벌인 죽음을 집행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의 존엄성과 권위를 유지하시며, 동시에 또 한 번의 기회를 아담과 그의 후손들에게 제공하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매우 놀랍고도 단순한 방법으로 이 어려운 문제에 대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의롭게 살든지, 또는 악하게 살든지를 불문하고, 제한된 일정한 삶의 기간을 가진 후에 죽을 수 있도록 계획하셨습니다.


첫 번째 죽음은 첫 시험에서 아담이 실패한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첫 번째 죽음(그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죽음이 아님)으로부터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서서 죽기 전 자신들의 생애 동안에 개인적으로 지은 죄에 대해서 답변하게 될 것인데, 이것에 대해서는 그들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들의 영원한 운명은 두 번 째 시험이었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조건을 그들이 어떻게 충족시켰느냐에 따라서 결정될 것입니다.

만약 인류가 두 번째 시험에서 실패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의 시험의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며, 그들의 죽음은 둘째 사망이라고 불리는 최종적인 영원한 죽음이 될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의 말이 더욱 잘 이해되실 겁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린도전서 15:22).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속의 계획 속에는 첫째 사망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동과 선택에 기초한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단지 유황불 못에 던져 죽이시기 위해서 악인들을 부활시키시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고 독재적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왜 그들을 그냥 첫째 사망의 권세 아래 놔 두시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죽음은 아담의 후손 자신들의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와 결정에 의해서 심판받는 것이 공정한 처사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공의는 각 개인들에게 자신들의 구원을 위한 조건을 충족시킬 것을 요구합니다. 부활이 없이는 어떤 심판도 행해질 수 없고 어떤 정당한 보상도 주어질 수 없습니다. 의인과 악인 모두를 부활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표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둘째 아담이 시험에 응함

지금까지 첫째 죽음과 둘째 죽음을 공부했으니, 이제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역할을 살펴보십시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전 인류를 대표했던 것처럼,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서도 모든 사람을 대표하셨습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로마서 5:18,19).

우리가 살펴 보았듯이, 첫 아담에게 일어났던 것은 무엇이나 그가 대표했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둘째 아담의 경험도 모든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 바울의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창조주이신 예수께서는 인류의 가족이 되셔서, 마치 그 자신 안에 모든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서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갈라디아서 2:20)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침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로마서 6:4).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 6:4). 인간의 삶은 그리스도의 생애의 사건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첫 아담이 실패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인류와 동일한 육체를 취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히브리서 2:17). 죄를 정복하는 면에 있어서, 예수께서 그분의 형제들보다 어떤 유리한 초자연적 능력을 가지셨었다면, 예수께서는 사단으로부터 공정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사단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불합리하고 불가능한 순종을 인간에게 요구하신다고 비난해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육체와 본성을 취하신 상태에서, 하나님의 요구들을 충족시켜야 하였습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만, 사단의 거짓 고소를 반박하실 수 있었는데, 이는 누구든지 하늘 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죄와 유혹을 승리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의 육체를 취하신 예수께서 아담이 실패하였던 완전한 순종의 모본을 보이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는데, 그것은 죄와 사망에 대한 완전한 승리였습니다.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아담의 실패로 인한 결과와 영향 때문에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아담의 가족인 인류는 영원히 고통당하고 패망할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로 인하여, 첫째 아담의 가족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소식이 아닙니까?


기록을 바꿈

첫째 아담은, 육체적인 출생을 통하여, 죄로 인해 연약하고 타락한 육체와 죽음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은, 영적인 출생(성령으로 나심)을 통하여, 당신의 죄 없고 순결한 경험 -신의 성품, 승리 그리고 영원한 생명 -을 당신의 영적 자녀들에게 물려주셨습니다. 첫째 아담이 실패함으로써 발생한 모든 결과와 영향들이, 둘째 아담에 의해서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영적인 출생 즉, 성령으로 새로 태어남을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의 마음과 영혼 속에서 재창조가 일어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인간을 희망 없고 속절없는 상태에서 구원에 이르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자신이 속해 있는 족보가 바뀌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경험 중의 하나입니다. 모든 아담의 가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경험을 갖게 되는데, 이로써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 태어나는 거듭남의 경험은 어떤 어려운 이론도 아니며 신비적인 경험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가장 실제적인 경험입니다. 거듭남은 우리에게 마음과 본성의 변화를 가져다 주는데, 이 경험이 매우 실제적인 것처럼, 새 가족으로서의 특권도 실제적입니다. 그 특권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이 받아들이기 가장 어려운 것 중에 하나는, 새로운 가족 관계하에서 일어나는 위치나 권위 또는 소유권의 완전한 변화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수 있는 모든 부요함과 유익들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 새로운 영적 관계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놀라운 약속들이 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로마서 8:16-17). 바울은 우리들 앞에 놀라운 약속을 제시하였습니다. 함께 한 후사(join-heir)라는 말은 모든 가족의 재산에 대해서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무한한 부(wealth)의 후사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처해 있는 비참한 가난에서 벗어나, 이제 우리는 우주를 하나님과 함께 소유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물 속에는 은하계들과 우주의 다른 별세계들도 포함됩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부의 실제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 각 개인이,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영적 부요함을 함께 소유하게 됩니다. 그분께서 가지신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도 함께 소유하게 됩니다. 바울은 성령 충만한 삶의 무한한 자원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에베소서 3:19). 이런 말들을 과연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죽도록 내어주신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아들이 가지신 모든 것을, 아니 당신께서 가지신 모든 것들까지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하늘 왕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재산과 함께, 우리는 하늘 가족의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또한 가족들이 서로 닮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새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하늘 아버지의 품성을 닮게 됩니다. 우리가 하늘 가족에 입적될 때, 우리는 새 아버지와 맏형님을 닮기 시작합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로새서 3:10). 태초에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렸습니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 아담이 일백 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창세기 5:1-3)았다는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듯이, 아담은 하나님을 닮았었습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그 닮음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아들은 하나님을 닮을 수 없었으며, 아담을 닮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거듭남을 통하여, 인간은 범죄한 아담의 모습이 아닌 자기를 새로 지으신 예수를 닮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닮음일까요? 아니면 상징적인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것처럼 보이도록, 어떤 환각 작용을 일으키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영혼 속에서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나도록 권능을 부여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의가 인간에게 상징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실제적으로 인간에게 나누어지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의가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단지 간주될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단지 의롭게 여겨질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실제적으로 죄를 승리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생애를 살 수 있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매우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로마서 5:19). 하늘 아버지의 자녀가 됨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아버지 하나님과 맏형님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되는데, 바로 이 새로운 영적 출생으로 인해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본성을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필연적인 둘째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첫째 시험에서의 아담의 실패에 대한 형벌인 첫째 죽음을 취소시키지 않으셨으며, 그대로 집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둘째 시험에서 그분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둘째 죽음을 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신하여 둘째 사망의 그 무서운 형벌을 당하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고, 그 죄가 요구하는 형벌을 자진하여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오는 한 가닥의 희망의 빛도 없이, 수십억의 잃어버린 영혼들이 맛보아야 할 어둠에 싸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둘째 죽음을 맛보셨던 것입니다(히브리서 2:9).


아브라함의 불 시련

예수께서 그러한 경험을 통과하시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까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과 떨어져 계시면서, 그 아들을 마치 가장 흉악한 반역 죄인처럼 대하시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까요?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의 격렬한 고통을 어느 정도나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은 아브라함인데, 그는 자기의 외아들을 포기함으로써 십자가의 고뇌에 동참했던 첫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갈라디아서 3:8)였다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도 아브라함이 속죄에 대한 특별한 계시를 받았음을 인정하셨습니다. 말씀하시기를,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한복음 8:56).

어떻게 구약의 부조 아브라함이, 메시아의 사업에 관한 예언적 통찰을 가질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리아 산에서 가졌던 그의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내 사라의 말라붙은 태를 통하여 그에게 아들을 주실 수 있음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죽음과 삶에 대한 또 다른 시험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아들 이삭을 제단 위에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리아 산까지의 외롭고 쓸쓸한 그의 여행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 중의 하나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명령의 확실성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친구였으며, 그분의 음성을 깨닫는 데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삭을 통하여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이미 여러 번 반복해서 들었었습니다. 이제, 세상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통하여 복을 얻고 구원을 받을 터인데, 그 아들의 생명을 취하라는 명령이 그에게 떨어진 것입니다. 만일 이삭이 제단 위에서 불에 태워진다면, 약속된 구세주가 어떻게 오실 수 있을까?

두 부자가 모리아 산 허리에 도착했을 즈음에,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단호히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종들에게 말하기를,나와 아이가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세기 22: 5, 영문). 아브라함의 이 말 속에는 약속의 성취를 믿지 못하는 어떤 연약한 흔들림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죽은 자가 부활했던 사건이 그때까지 한 번도 없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의 자손에 대한 당신의 약속을 성취시킬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순복하는 아들을 향해 칼을 쳐들었을 때, 그는 어떤 사람도 당해보지 못한 격렬한 시련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그의 아들의 생명을 취하려는 행동이었습니다. 그 칼을 한 번 내려침으로써, 그는 자신과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의 유일한 희망을 멸하고자 하였습니다. 그 순간에 아브라함은 세상의 운명을 자기의 손에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부성애(fatherly affection)의 시험 그 이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는 것은, 세상의 구세주가 태어날 통로를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아버지인 자신을 죽이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을 수반하였습니다. 이삭을 통하지 않고서는 메시아가 탄생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이 계속해서 그의 귀를 울렸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시험이 어느 정도 격렬한 것이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되십니까? 요한복음 8:56에서, 예수께서 아브라함이 당신의 날을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조금도 이상한 말씀이 아닙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천사들에 의해서 아브라함의 팔이 멈춰지고, 하나님께서 미리 마련해두신 다른 희생 제물이 이삭을 대신해서 죽었지만, 아브라함은 그날 정말 자신의 아들을 포기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외아들의 죽음에서 오는 모든 괴로움과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두려움 등을 경험하였습니다. 자신의 아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일을 거절하지 않는 것이 충분히 입증된 후에서야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아버지의 뜻에 순복한 이삭의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이 감동적인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속죄의 사랑과 희생을 조금이나마 이해시켜줍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드님이 어떠한 고통을 당하셨는지 희미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인류의 죄에 대한 대가인 죽음을 요구하였으며,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의 아들을 영원한 죽음의 위험 가운데로 내어주는 희생을 만들어냈습니다.


어떻게 십자가가 용서를 제공해 주는가?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하늘 드라마의 또 다른 면을 살펴 보기로 하십시다. 어떻게 한 사람, 둘째 아담의 죽음이 죄지은 모든 사람에게 용서를 제공해 줍니까? 성경은,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히브리서 9:22)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함은 물론 용서를 말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의 용서를 가능하게 만들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모든 것들의 핵심입니다. 죄인을 용서하는 권위를 얻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둘째 죽음을 경험하셔야만 했습니다.

용서는 자기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가 용서해 줄 사람을 대신해야만 하며, 그가 저지른 잘못의 결과를 기꺼이 담당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의 빚을 탕감(용서)해 준다면, 그만큼의 돈의 손실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친구가 주먹으로 한 대 쳤을 경우, 그 친구를 용서하려면 그에게 치료비를 요구하지 않고 기꺼이 그 고통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공의는 모든 범죄자들에게 자신이 저지른 것에 비례하여 보상할 것을 요구합니다. 즉,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주먹으로 한 대 친 사람은 그도 똑같이 한 대 맞아야 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범죄자가 받아 마땅한 형벌로부터 그를 구해줍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자는 범죄자가 형벌을 받지 않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자신이 그 결과 즉, 죄의 대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 없는 사람이 죄를 범한 자를 대신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예를 하나만 더 들겠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해 주기를 원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살인자가 범법자로 형벌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법이 살인자에게 요구하고 있는 형벌인 사형을 자신이 떠맡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에게 저지른 범행에 대한 형벌을 자기 자신에게 받아들임으로써, 그는 자신의 죽음을 허락하여야만 하며, 법적으로 살인자에게 가해져야 할 형벌을 그를 대신해서 충족시켜야 합니다. 이 예증은 우리로 하여금 대속의 뜻이 무엇인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지금 우리는 깨어진 관계의 재조정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대속입니다. 항상 양편이 관련됩니다. 잘못을 당한 쪽과 잘못을 범한 쪽, 잘못을 당한 쪽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죄를 저지른 쪽입니다.

공의는 죄의 합당한 배상을 요구합니다.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법과 공의에 의해서 이미 규정된 형벌을 집행하든지, 아니면 피해자 쪽이 자비로운 용서를 베풀어야 합니다. 만약 용서가 베풀어진다면, 용서하는 자는 상대방이 저지른 죄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대신하여 법이 정하고 있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법이 정하고 있는 죄의 대한 형벌은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법이 죄인에게 요구하는 형벌인 둘째 사망의 고통을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당신의 몸으로 당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죄에 대한 형벌은 첫째 죽음이 아니라 둘째 죽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깊은 고뇌를, 죽음을 당하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로마 시대에 수많은 범죄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첫째 죽음의 신체적 고통만 당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가장 악한 죄인이 유황불 못으로 던져지는 고뇌와 두려움을 느끼는 무서운 정죄를 경험하셨습니다. 그분의 예민한 본성은 더러운 강간, 살인, 흉악한 죄들을 대신 지심으로써, 심한 충격과 상처와 수치를 받았습니다. 그분께서는 죄에 대한 형벌이 멸망 받을 자에게 내려지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대가를 치르시기 위해서, 즉 율법의 두려운 진노가 당신 자신 위에 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죄 자체가 되셨습니다.

이와 다른 방법으로는, 우리 구세주의 생명이 끊어지는 시간에 그를 에워싼 영적 고뇌의 신비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예수께서는 인류가 쌓아놓은 죄를 당신의 찢어진 가슴으로 지셨습니다.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한줄기의 빛도 십자가 위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닿을 수 없었습니다. 하늘 아버지와의 완전히 분리된 상태에서, 여러분과 저의 죄를 지시면서 고뇌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죄인들을 위한 용서를 제공해 주시기 위해서, 죄인들의 죄과를 대신 취하시는 주님의 정신적인 고뇌와, 더 이상의 아무런 소망도 없이 영원한 둘째 사망을 당하는 죄인들이 느끼는 고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어야 했습니다.

아무도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과 똑같은 고통을 당하지 않으셨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사악한 인간들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서 죽이기까지 하나님께서 참으신 것은, 그분께서 아들 예수를 사랑하신 것과 똑같이 우리 죄인들도 사랑하신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셔야 했던 선택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우리를 법의 정죄 아래에 내주시고 당신의 아들을 살리시든지, 아니면 당신의 아들을 법의 정죄 아래로 내어주시고 우리를 살리시든지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밖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율법이 범하여졌습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반사하는 거룩하고 완전한 율법은 변경되거나 파기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죄에 대한 형벌이 치러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율법을 깨뜨린 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당신의 아들도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 주변의 장면을 다시 한 번 바라보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이 예수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때리고 주먹으로 치는 것을 내려다 보셨습니다. 주님의 옷자락 끝을 만질 가치도 없는 자들이 그분을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쳐서 순식간에 없애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잔인한 학대와 매질에서 당신의 아들을 구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분께서 개입하셨더라면, 단 한 인간도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담, 아브라함, 요셉, 다니엘, 그 외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아무런 소망 없이 영원히 멸망 당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부활은 전적으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과 부활에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개인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의 비참한 실패들을 보시면서도, 여전히 우리가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렇게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제공된 용서와 구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주 적은 소수가 당신을 사랑하며, 당신의 아들의 대속적 죽음을 감사함과 기쁨으로 받아들일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고통으로부터 돌아설 수밖에 없으셨으며, 당신의 아들이 짓지도 않은 죄의 짐 아래 눌려서 두 번째 사망의 고통 가운데서 죽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태양마저 그 무서운 장면으로부터 자신의 얼굴을 가리워서 칠흙 같은 어두움이 십자가를 에워쌌고, 땅도 저항하여 떨때에, 예수께서는다 이루었다라고 크게 외치시며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9: 30).

값이 너무 큰 것인가?

이렇게 해서 드디어, 용서와 구원을 위한 값은 지불되었습니다. 너무 비싸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드려진,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희생이 공허한 투자가 되었으며, 무의미한 희생이 되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모든 희생을 무관심하고 가볍게 여기면서 그것을 거절해 버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제, 그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조금 이해할 수 있나요?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 그분께서 투자하신 대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감사할 마음이 생기십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죄에 대한 대속의 전체적인 범위에 초점을 맞추어 왔습니다. 그 대속이 지금까지 지구 상에 존재했던 모든 남녀들에게 어떻게 제공되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도록 강권한 것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크기와 깊이는, 단 한 명의 영혼을 위해서도, 그분으로 하여금 동일한 희생을 치르도록 이끌었을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실 뿐 아니라, 저를 또한 개인적으로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주셨다는 사실을 매일 제 자신에게 상기시킵니다.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 놀라운 특성은 그분의 죽으심이 모든 개인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성경의 여러 곳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어떤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서 그분의 사랑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개인들을 위해서 자신의 시간을 소비하셨으며, 자신의 노력을 바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거라사의 광인들을 구하시고자 바다를 건너가신 위험한 항해에서 그분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폭풍이 거세었던 갈릴리 호수를 건너갔다 오시는 데에 꼬박 이틀이 걸렸습니다. 그분은 귀중한 시간들을 각 개인을 위해 소비하셨습니다. 그 고된 여행 중에 단지 한 사람만이 직접 주님과 만나서 이야기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후에 온 마을 사람들을 구세주께 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주님께서 니고데모와 만나시고, 문둥병자, 기생, 천대받는 세리와 이야기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분의 개인적인 관심과 사랑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지위의 높고 낮음과 재산의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개인을 영생을 위한 지원자로 보십니다. 예수께서 시몬, 삭게오, 막달라 마리아 등과 접촉하셨던 것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께서는 모든 영혼 속에서,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당신의 품성을 반사하게 될 놀라운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이 성육신 하여야만 각 개인들과 만날 수 있으며, 이야기 할 수 있고, 만져볼 수 있었습니다. 각 영혼은 그분께서 오셔서 구원하셔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으로 하여금 고통의 잔을 마시도록 만들었던 것은, 그분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던 각 개인의 얼굴들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대속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가장 놀라운 언급은 히브리서 12장 2절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어떻게 십자가의 그 무서운 경험 속에서 기쁨을 생각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그분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부끄러움과 굴욕을 무릅쓰게 만든 어떤 즐거운 동기가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여기에, 그분께서 자기를 버리실 수 있었던 어떤 비밀이 들어있지 않을까요? 그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영원한 왕국으로 맞아들이고자 하는 벅찬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해 내셨던 것입니다. 그분으로 하여금 견디어 낼 수 없는 고통을 견디어 내시도록 만들었던 것은, 우리를 향하신 사랑과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는 욕망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십자가의 잔인무도함을 참으시기 위해서, 여러분과 저를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한 영혼이 그렇게 무한한 가치가 있습니까? 영원한 내세를 생각해 본다면,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한 영혼이 지구에 존재했던 모든 인구들의 전체 수보다도 훨씬 더 오래 살게 될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 구원받은 한 사람이 살게될 영원한 생애는 이 지구 상에 존재했던 총 인구수와 각 사람의 나이를 곱한 숫자의 수 백만 배보다 훨씬 더 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구원받은 한 영혼은 멸망 당한 모든 사람들의 생명보다 더 긴 생명을 가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평범한 남녀 또는 아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보실 때마다, 이 사실을 인식하셨을 것입니다. 심지어 가장 타락한 사람에게서도, 그분께서는 영원한 세월을 두고 당신의 사랑을 기념할 한 생명을 보셨습니다.

갈바리에서 치러진 엄청난 실제적 대가를 생각한다면, 누가 감히 세상을 향한 그분의 사명을 가볍게 평가하겠습니까?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가 우리 구세주의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영원토록 증거할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작은 것을 얻기 위하여 그렇게 많은 값이 치러진 적은 일찍이 세상에 없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단순히 한 걸음 내디딤으로써, 우리는 첫 아담의 필멸의 생명을 버리고, 둘째 아담의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주님께 굴복시키고 그분의 공의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그분께서만 누릴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도 함께 누리기 시작할 수 있는데, 이는 우리가 받아 마땅한 죄과(guilt)와 정죄와 죽음을 그분께서 기꺼이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이것은 영원한 세월을 두고 우리의 연구의 주제가 될 것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는 그분의 대속적 사랑과 희생의 성격을 점점 더 깊이, 점점 더 새롭게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히브리서 2:3). 히브리서의 이 질문에는 답이 없습니다.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도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제공된 구원을 지금 당장 받아들이십시오. 더 이상 그것을 소홀히 여길 수 없습니다.


제2부 :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 이야기


서론
어느 날, 유명한 전도자인 무디 선생이 시카고에서 설교를 하고 있었는데, 약간 술기운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 교회 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보면서 교회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교회 문을 연 후에, 그는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오직 설교 단 뒤에 붙어 있는 표어를 보았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는 문을 다시 거칠게 닫은 후, 계단을 내려가면서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하나님은 사랑이 아냐. 만일 그가 사랑이라면, 나를 사랑했을 거야. 그러나 그는 나를 미워하고 있어.

그는 휘청거리는 발걸음을 옮기면서 여전히 중얼거렸다. 그러나 교회에서 보았던 그 말씀이 술기운으로 인하여 마비되어 가고 있는 머리 속에 계속해서 떠올랐다. 어떤 힘이 그를 다시 교회로 이끄는 것 같았다. 결국 그는 그 교회의 교인들과 함께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그때까지 무디는 설교를 계속해서 하고 있었다. 설교가 끝난 후, 무디는 교인들과 악수를 하기 위해서 입구로 가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모든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지만, 그 사람은 떠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은 채 울고 있었다. 무디는 그의 곁에 앉아서 어깨에 팔을 두른 후, 내가 당신을 위하여 무슨 일을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오늘 나의 설교 중에서 어떤 대목이 당신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까?라고 물어 보았다.

그는, 오, 무디 선생, 나는 오늘 저녁에 당신이 했던 설교를 한 마디도 듣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저 당신의 머리 위로 보이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글을 읽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무디는 그의 곁에 앉아서 한동안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후, 그는 무디가 믿는 하나님을 자신의 마음에 받아들이게 되었다.

형제자매들이시여,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분의 모든 행동과 방법이 사랑을 증거하고 있다. 그는 사랑으로 사람을 창조하셨고, 사랑으로 사람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시편 8:5). 사랑으로, 그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만드셨다(창세기 1:27).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그렇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

하늘 아버지를 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7:3).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를 아는 것은 정말 영생을 의미한다. 그분에 대하여 지금보다 좀더 잘 알기 위하여, 함께 공부해보자. 그분을 앎으로써 그분을 더욱 더 사랑할 수 있도록 .....

외로우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최고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 언제나 함께 있기를 원하신다. 만일 내가, 하나님께서는 한때 자신이 사람과 나누었던 교제를 그리워하면서, 외로워한다고 말한다면, 여러분들을 내가 사람의 감정을 신에게까지 적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창세기 3장은, 인간이 죄에 빠지는 비극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 해가 질 무렵에 사람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아담과 하와의 얼굴을 마주 대하기를 즐거워하셨던 하나님의 습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대개 해가 질 무렵에 아담과 하와를 방문하셨을 것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셨는데, 그날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아담과 하와는 반가워서 뛰어나오는 대신에 나무 사이에 숨어 있었다. 한참 후에 두 사람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 채, 슬그머니 나왔다. 아담이 말하기를 내가 주의 음성을 들었으나 두려웠나이다.

사람의 언어 중에서 최초로 이상한 말이 등장했다. 두려웠나이다. 하나님의 걸작품인 우아하고 고상한 창조물이 두렵다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바로 이것이 죄가 낳은 결과이다.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라도 두려워하도록 만든다. 가장 용감한 사람을 가장 겁쟁이로 만들며, 부끄러움으로 머리를 숙이게 만든다.

이제 최초의 부부가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제거하기 위한 가장 놀라운 계획을 펼쳐 놓으신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나 추운 바깥세상으로 나갈 때, 그들은 자신들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따뜻한 옷을 입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세기 3:21).

오, 그 옷은 분명 가장 아름다운 옷이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 옷에는 창조주의 솜씨와 사랑이 담겨 있으며, 그들에 대한 깊은 동정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죽옷을 만들기 위하여, 한 생명이 죽어야만 하였다. 적어도 한 마리의 동물이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죽어야 했다. 죄의 대가에 대한 말없는 교훈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마치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듯하다; 얘들아, 만일 너희들이 또 다시 불순종할 경우에는, 이번에는 너희들의 손으로 흠 없는 양을 잡아서 죽여야 한단다. 양이 흘리는 피는 언젠가 너희를 위하여 흘려지게 될 내 아들의 피를 상징한단다. 흠 없는 양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와 죽는 한 생명을 의미한단다. 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하나님이 갖고 계신 인간의 모습

어떤 마을에 한 목사님이 살았었다. 그에게는 중학교에 다니는 14살 된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오후, 아들이 다니는 학교의

선생님이 방문 오셔서 목사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댁의 아드님이 아픈가요?
아니요. 왜요?
오늘 학교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랬어요?
오늘뿐만 아니라 어제도 오지 않았습니다.
설마 그럴 리가&.
그 전날에도 오지 않았답니다.
믿을 수가 없군요.
저는 그 아이가 매우 아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니요, 그 아이는 아프지 않았답니다.
아, 제가 좀더 빨리 부모님을 찾아왔어야 했는데&.

아버지는 매우 힘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고, 선생님은 곧 집을 떠났다.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조금 있다가 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빨리 나가서 문을 열어 주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는 지난 3일 동안의 일이 드러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경섭아, 잠깐 서재로 따라오너라 라고 말했다. 아들은 서재로 따라 들어갔고, 문은 굳게 닫혔다. 아버지가 먼저 말하기 시작하였다.경섭아, 학교 선생님이 오늘 오후에 다녀가셨다. 네가 오늘 학교에 오지 않았다고 알려 주셨다. 오늘뿐만 아니라 어제도 그저께도. 선생님은 네가 아파서 집에 있는 줄 알았고, 나는 네가 학교에 갔는 줄로 알았다. 내 마음이 얼마나 상했는지 너는 아니? 나는 너를 신뢰했단다. 나는 나의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항상 나는 내 아들을 믿습니다라고 말했단다. 그러나 너는 지난 3일 동안 나를 속였지. 내가 얼마나 너를 믿었는데, 네가 나에게 이럴 수가 있다니&. 나의 이 상한 마음을 어떻게 너에게 설명할 수 있겠니?

경섭이에게 있어서, 아버지께서 이토록 조용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를 너무나 힘들게 만들었다. 만일 아버지가 그에게 거칠게 말했거나, 회초리를 들고서 이야기하였다면, 그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한동안 조용한 정적이 흘러갔다. 이윽고 아버지가 말했다. 경섭아, 우리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하자. 경섭이는 점점 더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경섭이는 지금 기도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쓰라린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께 토로하였다.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의 마음에 어떤 고통을 주었는지에 대하여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아들은 기도하기 위하여 꿇고 있는 아버지의 무릎에서 자신의 죄를 볼 수 있었다. 아버지의 무릎이 자신을 보여주는 거울이 되다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기도를 마치고 일어섰다. 아버지의 눈은 촉촉히 젖어 있었다. 경섭이의 눈에도 약간의 눈물기가 남아 있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아들아, 죄가 있는 곳에, 고통이 있다는 것이 온 우주의 법칙이란다. 아무도 그 둘을 분리시킬 수 없단다.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곳에 죄가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란다. 아무도 죄와 고통을 분리시킬 수 없단다. 너는 죄를 범했지. 하늘 아버지가 우주의 지배자이신 것처럼, 아버지인 나도 우리 가정의 제사장이란다. 자, 이제 우리 이렇게 하도록 하자. 너는 지금 다락방에 올라가거라. 내가 너를 위하여 그곳에 침대를 마련해 줄 것이다. 나와 어머니는 식사 시간에 맞추어서 음식을 공급해 줄테니 네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던 기간만큼, 너는 거기서 있어야 한다. 3일 낮과 밤을.

경섭이는 한마디의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다락으로 올라가서 침대를 만들었고, 아버지는 아들을 말없이 포옹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그곳에 남겨두고 내려왔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그곳에 함께 있었다. 저녁 시간이 되어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식사를 시작했지만, 아들에 대한 생각 때문에 먹을 수가 없었다. 음식을 씹고 또 씹었지만, 입이 마르고 맛을 느낄 수 없어서 식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거실로 나가 앉았다. 아버지는 신문을 집어 들어서 읽기 시작하였고, 어머니는 전등 밑에 앉아서 뜨개질을 하였다. 시계가 9시를 알리는 종을 울렸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10시를 다시 울렸다. 이제 침실로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여보 주무시지 그러세요. 그러나 아버지는 조금 더 있다가 잘테니, 당신이 먼저 자구려. 어머니도 조금 있다가 함께 자겠다고 말하였다.

시계가 이미 11시를 알렸고, 12시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마침내 둘은 침실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서로가 잠을 자는 척 했지만, 서로가 잠을 자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윽고 어머니가 말하였다. 여보, 왜 잠을 못 주무세요? 아버지가 대답하였다. 당신 내가 자지 않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 당신도 자지 않았구먼.지금 경섭이가 다락방에 있는데, 내가 어떻게 자겠어요. 나도 그래서 잠을 잘 수가 없소.라고 아버지가 대답하였다. 시계가 열두 시를 알렸고, 다시 한 시, 두 시, 세 시를 알렸지만, 아직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마침내 아버지가 말하였다. 여보,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소. 다락방에 있는 경섭이에게 올라가야겠소. 아버지는 베개를 들고 살짝 방을 나와서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들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하여, 문고리를 살짝 벗기고 문을 밀었다. 다락방의 마루를 가로질러 창문으로 가서 누워있는 아들을 내려다 보았다. 아들은 인기척에 놀라서 눈을 크게 뜬 채 올려다 보았다. 아버지는 침대 속으로 들어갔고, 그 둘은 서로의 목 밑으로 팔을 둘렀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제일 친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 그들은 정말 친구였다. 그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서로의 뺨을 적셨다. 얼마 후, 그들은 깊고 편한 잠을 자게 되었다.

다음 날에도, 아버지는 여보, 나는 오늘밤에도 경섭이에게 올라가야겠소. 두 번째 밤에도 그들은 다락에서 함께 잠을 잤다. 세 번째 밤이 되자, 아버지는 다시 사랑하는 여보, 오늘 밤에도 나는 아들에게 올라가야 할 것 같아. 아버지는 자신이 아들에게 징벌을 주는 장소에서 함께 밤을 보냈다.

그 아들이 성장하였을 때, 중국에 들어가 선교사로 봉사했던 사실은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 아버지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인간의 모습을 아들에게 보여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없었던 것처럼 치워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죄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없애버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고통은 이 세상이 지금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던 것이다. 죽음의 감옥인 지상에서 인간과 함께 말하고 손을 잡고 누우셨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분이 하나님이시다. 지금도 그분께서는 여러분과 내 곁에 머무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미워하게 하고 순결함을 갈망하도록 도와주시고 계신다. 그분의 사랑을 이해하는 사람마다 죄를 증오하는 그분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갈바리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우리들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외치고 있다. 그 같은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 이러한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가? 아버지, 우리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당신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생애와 봉사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당신께 드리고 싶습니다.라는 소원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서 울려 나오지 않는가? 아직 그분의 사랑의 메시지를 찾지 못하였는가? 그대들의 눈과 귀를 열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연다면, 그분의 사랑의 음성과 글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posted by Jangjaed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