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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하나님의 뜻대로 배우려 함
Jangjaedang


제1부 : 영원한 지옥불은 정말 존재하는가?

풀리지 않고 뒤엉킨 진리

성경에서 가장 신학적으로 혼돈되어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지옥에 관한 주제입니다.

그것은 목사들이나 신부들에 의해서 잘못 해석되어 왔으며, 평신도들은 토속 신앙이나 불교 등에서 말하는 지옥과 혼돈함으로써, 지옥(hell)이라는 단어의 참된 성경적 정의가 파괴당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합니다. 지옥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악한 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사랑의 하나님께서 과연 영원토록 사람들을 고문하시겠는가? 모든 죄인들은 지옥에서 동일한 형벌을 받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반드시 성경적으로 해답을 주어야 하며, 그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우리가 기대하거나 믿던 것과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거절해서는 안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이 있으며, 또한 피할 수 있는 지옥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영혼은 구원을 얻거나 혹은 잃어버린 바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중립 지대란 있을 수 없으며, 천국을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어떠한 위로나 보상도 없습니다.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태복음 13:41-43).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에게 두 가지의 궁극적인 목적지가 있다고 볼 때, 우리는 얼마나 열심히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옥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 중에서 모든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절대적인 안전책은, 예수님께서 지옥에 관해서 가르치신 것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사실은, 지옥에 관한 그리스도의 진리가 많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도전을 받아 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 순간에 불멸의 혼이 육체에서 빠져 나와서 하늘이나 지옥으로 날아간다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가르치고 있다는 주장이 온 세상에 범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가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에 그 사람의 영이 육체로부터 빠져 나와서 분리된다고 말씀하셨던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악한 자가 죽는 순간에 즉시 영원한 지옥불의 고통 가운데 처하게 된다고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지옥에 대한 문제를 정말 어떻게 가르치셨는지에 대한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가복음 9:43).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지옥불에 들어가는 것은 어떤 신비스런 혼이 아니라 육체라는 사실을 명백히 밝혀 주는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5:30에서, 예수님께서는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손, 발, 눈 그리고 그 밖의 모든 부분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현대의 성직자들은 죽을 때에 혼이 육체를 연기처럼 빠져나간다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혼은 형상도 모양도 없다고 말합니다. 비록 그러한 견해가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선생이시고,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지옥불에 던지우는 자는 육체의 손, 발, 눈 그리고 모든 형상 그대로 던지움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악한 자의 장래 운명에 대한 다음과 같은 4가지 중대한 사실을 함께 조사하여보기로 하겠습니다.


심판 후의 처벌

지옥에 관한 첫째로 중요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죽자마자 처벌(심판)을 받기 위해 어떤 장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날에 형벌을 받기 위하여 무덤에 잠자는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진리를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명백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집주인이 밭에 좋은 씨를 심은 후, 그의 종이 와서 좋은 씨 가운데 가라지가 자라고 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종의 질문은 가라지를 아주 어릴 때 뽑아 버릴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태복음 13:29,30).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태복음 13:37-43).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를 오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너무 분명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린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라지는 악한 사람들을 표상하며, 그들은세상 끝에불에 던져질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구분이 되는 것은 바로 추수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추수 때는 세상 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누가 이러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오해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죽을 때에, 악한 자들은 즉시로 지옥불 가운데 던져진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의 상상은, 악한 자들이 세상 끝에 비로소 불 가운데로 던져진다는 우리 구주의 구체적인 교훈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심판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후에 이루어질 것이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그날 이전에 형벌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형벌을 받기 전에 심판(재판)을 받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타당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셨습니다.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베드로후서 2:9).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의 뜻은 형벌에 처할 심판의 날까지 보존하신다는 것-흠정역 참조) 이것은 확실히 이치에 맞는 말씀이 아닌가요?

만약 어떤 사람이 절도죄로 기소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판사가십 년 동안 감옥에 쳐 넣으시오, 그 후에 재판하겠소!라고 말했다면 그토록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재판관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 재판관조차도 그런 부당한 재판을 하지 않는데, 하물며 모든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그토록 어처구니없는 재판을 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 문제를 성경 속에서 주의 깊게 찾아보면 더욱 확실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악한 자의 형벌이 언제까지 보류될까요? 심판 때까지 입니다. 왜요? 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죄인도 심판을 받기 전에 형벌에 처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한복음 5:28,29).

얼마나 확실한 진리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선한 자와 악한 자가 각각 생명과 형벌(저주)을 받기 위해서, 그들의 무덤 속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그들이 죽은 후 부활할 때까지 어떤 보상이나 형벌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무덤에서 나온 후에,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그들은 심판 날까지 무덤 속에 간직될 것입니다.

만약 이것보다 더 쉬운 설명이 필요하다면, 누가복음 14:14에 있는 예수님의 설명을 보시겠습니다.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또한 마태복음 16:27에서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여기서 그때는 언제입니까? 바로 천사들과 함께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그분께서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까지, 어떤 보상이나 상급도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절이 31개나 있는데, 그것들 모두는 토론할 여지가 없이 명백한 말씀들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막연하거나 애매모호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의 바로 맨 마지막 장에서 다시 한 번 더 이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리라(요한계시록 22:12). 여기서 사도 요한은 각 사람마다 그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날에 구원이나 멸망의 상급을 받게 될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욥은 악인이 멸망의 날까지 보존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들은 진노의 날에 불려나가게 되리라라고 말했습니다(욥기 21:30, 영문 성경). 다니엘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다니엘 12:2).

악인이 부활하여, 심판과 처벌을 받게 될 때까지 무덤 속에서 지켜진다는 사실에 대하여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베드로, 다니엘, 욥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의 증거를 살펴 보았습니다.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악인들은 세상 끝까지 무덤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지옥 형벌은 첫째 죽음 이후에 즉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악인들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지옥불에 던져지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요한은 천 년(millennium)이 끝날 때쯤에 일어날 극적인 사건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요한계시록 20:7-9). 천 년(millennium)이 지난 후, 모든 악인들은 둘째 부활에 참여할 것입니다.


요한은 어떻게 의인들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늘에서 왕 노릇하는지를 설명한 후에,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요한계시록 20:5)고 기록하였습니다. 물론 나머지 죽은 자들은 악인을 말하는 것인데, 둘째 부활 시에, 사단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성도들을 대항하도록 미혹할 것입니다. 사단은 죽음에서 일어난 수많은 멸망 받을 자들을 한곳으로 모아들일 것입니다. 그는 다시 한 번 악한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며, 악인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에 대항해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고자 할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1:2). 악인들이 진군하여 예루살렘 도성을 에워싸려 할 때, 악인들은 갑자기 하늘에서 퍼붓는 활활 타는 불에 의해서 진멸될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대가로서 받는 최후의 형벌인 지옥불인 것입니다


지옥의 위치

성경 저자들은 지옥뿐만 아니라, 악인들의 둘째 사망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요한계시록 20:14). 베드로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 봅시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베드로후서 3:7). 그 다음에 계속해서, 그는 활활 타오르는 불로 하늘과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불사르게 될 하나님의 날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신성하지 못한 것에 대한 형벌을 강력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이 악인에게 가해질 심판과 파멸의 환난을 위해서 보존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에 대한 형벌이 이 땅 위에서 있을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보수할(보복의)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실 해라 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 그 땅은 역청이 되며(이사야 34:8,9).

선지자는 화염 속에 싸여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냇물과 티끌이 역청과 유황의 산화물로 폭발되는 모습을 말하면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보복이며 투쟁 끝에 일어날 신원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다윗도 다음과 같은 말로써 그 증거를 더 하였습니다.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 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시편 11:6). 이사야 선지자는 요한이나 베드로가 악인의 운명에 대해서 설명한 것과 거의 똑같은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모두가 형벌의 장소(땅 위)와 형벌의 도구(불)에 관해서 동일한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악한 자의 심판의 날에 이 땅은 불의 화염 속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대답하여야 할 질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가장 복잡하고 풀리지 않는 의문 중의 하나는, 형벌이 얼마 동안이나 지속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얼마 동안 악인들이 그 불 가운데서 고통을 받게 됩니까? 아무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말하기를, 악인들은 그들의 행한 바에 따라서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거기에는 형벌의 강도가 있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악인들이 영원히 불 가운데서 살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끝이 있는 지옥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악인들은 지옥불에서 끝없이 지글지글 불타게 되는데, 거기서 영원토록 고통을 당하게 될 거야.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해서, 지옥불은 끝이 있고, 악인들도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는 영원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확신을 갖게 만드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첫째, 이 지상은 궁극적으로 의인들을 위한 처소가 되도록 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5). 베드로는 이 땅이 굉음을 내며 폭발하면서 불타고 있는 장면을 설명한 후에, 의로 가득 찬 새 땅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베드로후서 3:13).

악인들은 이 지상에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아브라함의 영적 후사들에게 특별히 약속된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4:13).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죄의 저주를 정결케 한 후, 최초의 상태로 되돌아가야만, 원래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계획입니다. 지구는 완전한 사람들을 위한 완전한 처소로 회복될 것입니다.

둘째로, 악인들은 그리스도를 결코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상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영생의 선물을 받은 의인들만이 그 특권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그러나 마음 가운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멸망 당할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 이러한 말들이 지적하고 있는 단순한 진리를 놓치지 마십시오. 악인들에게는 결코 약속된 삶이 없습니다. 그들은 사망을 약속 받았습니다. 영원한 사망입니다. 의인들만이 약속된 생명 곧 영원한 삶을 부여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없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 대한 신뢰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요한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일서 5:11,12).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지옥불 가운데 쌓여 있는 악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들이 생명을 가질 수 있을까요? 요한은 말합니다.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한일서 3:15). 문제는 악인들이 지옥불 가운데서 영원한 생명을 가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결코 아닙니다.

지옥에서 영원토록 불타게 된다는 가르침은, 영원한 삶을 예수님 이외에 어떤 다른 곳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엄청난 이단적 가르침이 생기도록 유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디모데후서 1:10)고 기록하였습니다. 영감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종류의 불멸도 존재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악인에게 주어질 불멸에 대해서 언급한 성경절을 어디서 보셨는지요? 여러분들은 불멸의 영원한 생명을 받는 의인에 대해서는 흔히 읽을 수 있으나, 믿지 않는 자가 불멸의 생명을 받는다는 기록은 전혀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린도전서 15:51-53). 이 내용은 의인이 홀연히 불멸의 존재로 바뀌게 될 어떤 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은 미래입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부활이 있을 승리의 나팔 소리가 끝날 때, 이 놀라운 사건이 발생할 것입니다. 악인이 이러한 방법으로 변화되는 것을 성경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악인들도 지옥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가르치는 어떠한 근거나 이유도 성경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서에 위배되는 것이며, 상식 이하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에스겔 18:4).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상관없이, 죄를 버리고 회개하지 않는 영혼은 반드시 죽게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악인들이 지옥불 가운데 영원히 살게 된다고 가정한다면, 그들은 의인들이 다른 장소에서 누리고 있는 똑같은 생명을 갖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이외에 누가 그들에게 영생을 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이러한 문제를 매우 확실하고도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독생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죽을 것입니다. 그들은 둘째 사망으로 불려지는,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마지막의 영원한 죽음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 죽음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그것은 한없이 영원한 형벌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끝이 없는 영원한 죽음을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끌 수 없는 불?

어떤 이들은 이러한 질문을 던질지 모릅니다. 즉, 악인을 태우게 될 끌 수 없는 불이란 무엇입니까? 그 불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그 불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꺼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불을 끈다는 말은 없애버리거나 혹은 꺼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마음대로 지옥불을 끌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상한 불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 불을 끔으로써, 그 불로부터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보라 그들은 초개 같아서 불에 타리니 그 불꽃의 세력에서 스스로 구원치 못할 것이라 이 불은 더웁게 할 숯불이 아니요 그 앞에 앉을 만한 불도 아니니라이사야 47:14) 그러나 파멸의 작업이 끝난 후에, 그 불은 꺼질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 불을 꺼서 그 화염 가운데로부터 그들 스스로를 건져 낼 수 없으며, 마침내는 숯덩이만이 남겨지게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 성이 꺼지지 않을 불로 삼킴을 당할 것을 예언하였으며(예레미야 17:27), 타서 재가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역대하 36:19-21). 이 문제를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는, 성경에서 꺼지다라는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결코 꺼지지 않을 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 불은 아무도 끌 수 없으며, 그 불이 태우는 대상들이 완전히 재가 되어 없어질 때까지 탄다는 뜻입니다. 위에서 잠시 언급하였던 예레미야 17장 27절에 있는 말씀에서, 우리는 동일한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아직도 예루살렘 궁전이 불에 타고 있나요? 물론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전소시킬 때까지 불이 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지옥불은 아무도 끌 수 없는 불이며, 한번 불붙으면 마귀와 악인들을 완전히 불태워 재로 만들어 버릴 때까지 탈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옥불을 설명할 때 사용되고 있는영원이란 말과 영원토록 지속할이란 말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요? 성경에 있는 그 말의 정의를 찾아보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용어나 표현들이 이스라엘의 신"구약 시대 당시에 그것들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고려하지 않은 채, 단지 현대적인 감각에 맞추어서 그것들의 정의를 내리는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뿌리 깊은 번역상의 오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원한 불이란 결코 꺼지지 않을 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불이라는 표현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관련된 유다서 7절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만일 소돔성이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고 있다면, 지금도 소돔성은 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소돔성이 오늘날까지 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압니다. 소돔성은 영원한 불로 태워졌는데, 우리는 그것이 주고 있는 하나의 교훈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교훈인가요?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베드로후서 2:6).

바로 그것입니다. 소돔성을 재가 되게 했던 그 영원한 불은 악인에게 마지막으로 가해질 하나의 표본(샘플)입니다. 영원한 불의 의미는 영원토록 타고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불로 인한 결과가 영원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영원히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서 없어졌기 때문에 영원히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킨 것과 똑같은 종류의 불이 악인들을 화염으로 태우게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불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악인들을 재로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까? 성경은 그렇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amdiv;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라기 4:1,3).

어떤 다른 언어도 지옥불을 이렇게 분명하고도 힘있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영원한 불은 영원히 존속될 결과를 남길 때까지 타게 될 것입니다. 사단조차도 그 뿌리가 마침내는 완전히 뽑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이 사용하고 있는 표현을 그대로 빌려서 지옥불의 광경을 묘사한다면, 얼마나 일관성 있고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옥불에 대해서 말할 때에, 성경에 없는 단어와 표현을 사용해서 묘사한다면,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거짓을 말하게 되기가 쉽습니다.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물려받은 상식과 토속신앙의 영향을 받아서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그들을 태워 재로 만들 것이라는성경 말씀을 보면서도, 여전히 악인들은 영원토록 살아서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고집합니다.

우리가 한 가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애매한 성경 절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데살로니가후서 1:8,9).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영원토록 중단되지 않는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형벌의 결과가 영원토록 유지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형벌의 결과로서 영원한 멸망, 즉 영원히 멸망되어 완전하게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이곳의영원한 멸망의 형벌은 유다서 7절의영원한 불의 형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음). 이러한 말씀에 비추어 보더라도, 그들에게는 부활이나 생명에 관한 희망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지 않는 구더기에 관한 것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지옥에 관한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곡해하고 있습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마가복음 9:48). 어떤 이들은 그 구더기들을 사람의 혼(soul)으로 해석하여 왔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일까요? 성경에서 구더기를 혼으로 표현하거나 상징한 곳이 어디에 있나요?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왜 하필 구더기를 언급하셨을까요? 구더기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지옥에 와 있는 것일까요? 이 성경절에서, 예수님은Hell(지옥)이란 단어 대신에, Gehenna(게헨나, 지옥)이란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지옥은 그 당시에 예루살렘 남쪽 성 밖의 계곡에 있었던 실제적인 장소였습니다. 그곳은 힌놈의 골짜기로 불려졌으며, 예루살렘 성에 사는 사람들의 쓰레기 처리장이었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유대인들은 죽은 동물의 시체들과 쓰레기들이 계속해서 타고 있는 그 골짜기로부터 뿌옇게 올라가는 연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파괴적인 화염 밖 가장자리로 어떤 것이 떨어지게 되면, 그것은 벌레나 구더기에 의해 먹혀졌습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항상 불과 연기가 치솟았고, 악취가 풍기고 있었으며, 구더기들이 득실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앞에서 전개되는 게헨나(Gehenna, 지옥)의 완전한 파괴의 생생한 장면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지옥불의 완전한 파괴에 대한 하나의 예로서 이 예증을 들었던 것입니다. 불은 꺼지지 않고 밤낮 불타고 구더기들이 계속해서 시체들 위에서 움직이는 장면을 지적하시면서, 지옥의 완전한 멸망의 모습을 설명하셨던 것입니다.


아마 가장 쉽게 오해할 수 있는 지옥에 관한 표현은세세토록(forever and ever) 연기가 피어오른다는 요한의 표현일 것입니다.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요한계시록 20:10). 성경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다른 성경 절들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사실 매우 혼돈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신"구약 성경을 조사해보면 영원 또는 세세토록(forever and ever)이란 말이 57번이나 사용되고 있는데, 이 말은 이미 끝이 난 어떤 것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영원은 항상 끝없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 표현을 정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좋은 예들이 많이 있지만, 여기서는 두세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1장에는 노예 법에 관련된 기록이 있는데, 어떤 상황에서는 노예가 평생토록 주인을 섬기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출애굽기 21:6)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오랫동안 노예가 그의 주인을 섬길 수 있었을까요? 죽을 때까지밖에 섬길 수가 없죠. 그러므로 여기서 영영히(forever)란 말은 끝이 없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노예의 삶이 마쳐질 때까지의 오랜 기간의 봉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그녀의 아들인 사무엘을 하나님의 전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영영히 있게 하였습니다(사무엘상 1:22). 그러나 28절에서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라고 단순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원이란 용어의 일반적인 의미는 무한정한 시간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어떤 사건이 완전히 마쳐질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고래 배 속에 한동안 머물렀던 요나조차도 자신이 머물렀던 기간을 오래도록 즉 영어로는 forever(영원토록)으로 묘사하였습니다(요나 2:6).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반박할지도 모릅니다. 하늘에서 의인들은 영원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하늘에서 의인들의 생명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까? 물론, 영원토록 이라는 동일한 표현이 의인과 악인에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부류가 처해 있는 상황 사이에는 한 가지 놀랄 만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의인들은 불멸의 생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들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과 견줄 만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불멸은 죽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원이란 말은 의인들이 불멸의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끝이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적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원이라는 표현이 악인들을 묘사할 경우에 사용되면, 그것은 죽을 수 있고, 죽을 수밖에 없는 필멸의 운명인 피조물들에 관해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악인들에게 있어서 영원은 그들의 죽을 수밖에 없는 속성이 그들의 행위에 따라 받게 될 형벌의 불 가운데서 살아 있는 동안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나 악인들의 멸망을 묘사하기 위해 그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표현 방법이었습니다.


파멸 당하게 될 영혼과 몸

이것은 악인들의 운명에 관한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이 그들의 죄에 따라 형벌을 받은 후에는, 그들의 몸과 영혼이 함께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매우 단순하게 언급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 하라(마태복음 10:28).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사람들의 몸과 영혼을 함께 멸하실 것에 대해서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감히 누가 악인들의 혼에 대해서 불멸을 주장할 수 있습니까? 생명을 선물로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인 예수께서는 어떤 형태로든지 악인들이 지옥에서 계속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하셨습니다. 생명은 영원히 없어질 것이며, 몸은 화염 속에서 멸절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리로다(시편 37:20).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10절).


인간의 언어에 있어서 가장 힘있고 단호한 단어들이 지옥의 멸망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성경의 저자들이 말하고 있는 멸하다(destroy), 타버리다


(consume), 태워 없애다(burn udiv), 소멸하다(devour), 죽음(death)과 같은 단어들은, 그것들이 뜻하는 바가 정말로 죽음과 파괴와 태워 없어짐과 도말과 죽음 등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단어들이 어떤 신비하고 비밀스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생각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기독교 신학이 우리의 위대한 하나님을 사랑이 없는 어떤 악마로 만들어 왔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에 의해서, 하나님의 모습은 히틀러보다도 더 잔인한 존재로 묘사되었습니다.

아무리 히틀러가 사람들을 고문하고 실험하였다고 하지만, 결국에는 사람들이 가스실에서 죽거나 집단 화장터에서 태워져서 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불멸의 영혼들이 영원을 통해서 신음하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실 수 있도록, 그들을 살아 있게 하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신학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히틀러보다도 더 잔인한 분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렇게 왜곡시키게 됩니다.


참된 하나님의 공의

이러한 잘못된 표현은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훼손시킬 뿐 아니라 그분의 공의를 왜곡시키게 됩니다. 죽음의 순간에, 영원한 지옥에 떨어진다는 거짓 가르침 속에는 어떤 위험이 포함되어 있을까요? 잠시 함께 생각해 봅시다. 5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있는데, 그는 자신이 지은 어떤 죄를 간직한 채 죽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그의 영혼이 영원히 고통당할 불 가운데로 즉시 떨어졌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수백만의 사람들을 죽인 장본인인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은 어떠합니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믿음에 의하면, 히틀러의 영혼도 역시 영원한 고통이 있는 지옥으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평범한 죄로 인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던 사람은 히틀러보다 5000년이나 더 오래 유황 불에 탈 것입니다. 그런 심판을 어떻게 정당하고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과연 그러한 방법으로 인간들을 취급하실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각 사람의 행위대로 형벌을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악인들이 받게 되는 형벌에 관련된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보편주의(universalism)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너무 관대하시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이라도 멸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악인은 영원토록 고난의 어두운 미로 속에서 끝없는 고통을 겪게 된다고 믿는 무서운 견해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성경으로 증명될 수 없는 가상적인 견해들입니다. 진리는 그 두 가지 사이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형벌을 내리실 것이며, 자신들이 받아야 할 형벌이 마쳐질 때에 몸과 생명이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


나의 지나간 전도 및 목회 경험을 근거로 해서 볼 때, 수많은 정직한 영혼들이 하나님의 품성에 대해서 그릇된 오해를 가지고 있을 경우, 그들은 어떤 순간에 마음이 갑자기 변하여 하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들은 타당한 이유 없이, 끝없는 고통 중에 있어야 하는 악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대하여 의심과 회의를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악인들이 받는 형벌은 하나님의 복수심에서 나온 것이라고까지 생각하였습니다. 지옥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의 성품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실까요? 지옥에 관한 성경상의 진리를 들은 후에, 한 은행장은 나의 어깨 위로 그의 팔을 걸치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나는 다시 믿기로 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나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악인들을 고문한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무신론자가 될 수밖에 없었지요.


더 이상의 고통이나 죽음이 없음

이제 곧, 하나님께서 우주를 정결하게 하실 것입니다. 모든 죄의 결과가 영원히 추방될 것입니다. 죄도 없고 죄인들도 없으며 유혹하는 마귀도 없을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과 똑같은 상태로 회복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미래의 영광스러운 장면을 계시 가운데서 보면서, 이러한 말로 묘사하였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요한계시록 21:4. 재창조함을 받은 우주에서, 어떤 사람이 어느 곳에서 고통을 겪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눈물이나 고통이 더 이상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겠습니까 혹은 인간의 추측을 따르시겠습니까? 이 약속을 쓰기 바로 전에, 사도 요한은 악인들이 어떻게 지옥불에 던져지게 되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요한계시록 20:15, 21:1).


요한계시록 20장 9절에 따르면, 유황불이 타는 곳은 다른 곳이 아닌 이 지구의 지면에서 불타게 될 것입니다. 불타고 있는 악인들은 재가 되어서 이 땅에서 사라진 다음, 하나님께서 새 땅을 재창조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요한계시록 21장 2,3절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고 있으며, 4절에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주 가운데에 더 이상의 고통이 존재하지 않기 위해서는, 영원한 지옥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것은 서로 상충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온 세상의 고통을 종결지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사단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새 왕국에는 어떠한 고통의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시고 계십니다.


지옥은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곳이 아님

마지막으로 우리는 지옥이 결코 여러분들과 저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 아님을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옥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5:41). 만약 우리가 지옥불에 떨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범했던 것 중에서 가장 큰 실수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간구, 그리고 수많은 천사들의 경건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을 무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산산이 부서진 육체를 넘어서 그곳(지옥)에 가야 할 것입니다.


죄를 범했다고 해서 반드시 멸망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했고, 도적질을 했으며, 혹은 간음했다고 할지라도, 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든지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단지 그가 자신의 죄에서 돌아서기를 거부하고, 모든 불의(unrighteousness)를 용서하고 깨끗하게 하시기 위하여 기다리고 계신 사랑의 구세주의 가슴에 자신을 맡겨 버리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제2부 : 부자와 거지 나사로

서론

누가복음 16장 19-31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비유로서 이해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이 이야기를 통하여서 사람이 죽은 후에 저 세상에 가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하여 설명하여 주셨다고 믿습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이 성경 절들에 나타나 있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묘사를 정반대로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예수께서는 지옥과 천국이 아닌 전혀 다른 교훈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성직자들은 이 예화를 문장의 전후 문맥에서 분리시켜 왔으며, 지옥에 대한 공포심을 넣어주기 위한 도구로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를 잘못 해석함으로써, 지옥에 대한 공포심에 근거한회개(?)가 일시적으로 생길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품성과 성경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통하여서만이 참된 회개와 믿음이 생기게 된다는 진리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본 연구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 비유가 진실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하며, 예수께서 이 이야기를 말씀하신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우리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교훈이 무엇인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랜덤 하우스 대학사전(The Random House College Dictionary)에는 비유의 정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진리나 도덕적인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간단한 풍유적인 이야기 쿠루던즈의 용어 해설 집(Crudens Complete

Concordance)에는 이 개념을 좀더 폭넓게 묘사하고 있는데, 성경에 나타난 비유는 어느 다른 곳에서보다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저자들이 비유 가운데 사용하고 있는 상징(가시나무에게 왕이 되도록 요구하는 나무들- 사사기 9:14,15)과 실제의 상황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비유가 어떤 형태로 되어 있든지 간에 도덕적인 교훈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성경 안에서 수없이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비유

예수님은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에 비유의 가치를 잘 아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고 명상하도록 자극을 주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자신이 너무 실재 그대로 말씀하신다면, 듣는 청중들 중의 어떤 이들은 곧 말씀을 잊어버릴 것을 아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의 비유 중의 어떤 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혹독한 비난을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방법으로 이사야 6장 9절의 말씀을 재인용하시면서 그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누가복음 8:10). 쿠루던즈 용어 해설집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실 때에 우리 주님은 자주 비유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분은 진리를 자원하여 알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진리를 가리우기 위하여 비유를 사용하셨다. 진리를 진정으로 갈급하는 사람들은 그 의미를 발견할 때까지 쉬지 않을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 누가복음 16장 19-31절을 말씀하실 때에 누구에게 말씀하시고 계셨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다루고 계셨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시작되기 14절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지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이라는 말씀을 14절에서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진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한 무리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모든 사람들 중에 바리새인들보다 더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할 사람들이 없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대하여 속임수와 모사로 일관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지혜롭고 진실되게 취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지적하는 말씀을 하시는 데에 있어서, 가장 안전한 방법은 비유와 풍유를 사용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누가복음 10장 21절에 있는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나이다. 마가복음 4장 33,34절에서는 예수님의 교훈이 많은 경우에 비유로 나타났음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부자와 나사로 비유의 요점

자, 그러면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께서 그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기를 원하셨던 진정한 기별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구별하여야 합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 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 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누가복음 16:19-21).

이 이야기 가운데 나타나 있는 부자는 누구였습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 사업을 아는 지식으로 인해서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복을 받아 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로마서 9:4). 이 이야기의 나중 부분에 나오는 부자의 말처럼, 유대인만이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 나라는 이러한 특권을 가지고 있던 국가이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나사로는 영적으로 가난한 모든 사람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이 받은 영적 유산을 나누어 주어야 하였을 이방인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이 유대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사야 49:6).

그런데 불행하게도 유대인들은 그들의 영적인 부유함을 이방인들에게 전혀 나누어주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들은 이방인들을 마치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에도 만족하는개들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비유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실 때에 사용하셨던 비유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말하기를,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마태복음 15:26-27).

부유한 유대인들은 진리를 나누어 주지 않은 채 보관하여 왔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붕괴시켜 왔던 것입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잠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영적인 교만을 책망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누가복음 16:15). 이러한 엄청난 교만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덩이가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 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6: 22-26).

유대인들은 지상에 있는 동안 좋은 생활을 즐기었으나 그들의 이웃을 부유케 하거나 축복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어떤 보상도 주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여 울리로다 (누가복음 6:24,25).

이와는 대조적으로, 나사로에 의해서 상징된 영적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하늘의 왕국을 물려 받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굶주리고 목마른 이방인들이 부유한 유대인들의 자리를 채울 것입니다. 독선적인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업신여김을 받는 개들과 죄인들이 하늘에 들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21:31).

이 비유는 부자가 그의 형제들에게 자기와 같은 운명을 당하지 않도록 호소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 임무를 위해서 나사로를 보내라고 아브라함에게 간구하면서 부자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누가복음 16:30. 아브라함은 대답하기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31절)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초자연적인 현상마저도모세와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계속해서 거절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시면서, 성경 말씀을 등한히 여겼던 바리새인들을 나무라셨습니다. 그 후, 얼마 후에 죽은 자 가운데서 실재 인물인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정확하게 확증시킨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한 사람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지만, 교회 지도자들과 관리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은 부활한 나사로를 죽이려고까지 계획했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바리새인들에게 자신들의 위선을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내세에 있어서의 두 개인의 실재적인 경험이라고 잘못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념을 근거로 하여서, 어떤 이들은 지옥의 불타는 고통 속에 던져진 사람들이 영원히 멈추지 않고 불에 탈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비유를 사용하셨던 이유와 목적을 보지 못한 채, 비유에 나타나 있는 이야기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해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지금도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죽으면 모두 아브라함의 품 안에 안겨진다고 믿게 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누구의 품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인간 아브라함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대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천국과 지옥 사이에 실질적인 거대한 장벽이 있다면 어떻게 부자가 아브라함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더욱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악인들이 고통 중에 빠져 아우성치고 있는데, 어떻게 하늘에 있는 의인들이 천국의 안락함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비유는 비유로서 해석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서 야기되는 또 다른 딜레마는 빈 무덤의 신비입니다. 만약 이 이야기가 문자 그대로 해석된다면, 두 사람 모두 무덤 속에서 누워 있지 않았다는 결론을 가지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육체를 가지고 지옥과 천국에 갔다고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자가 그의 눈을 치켜 뜨고 아브라함의 품 속에서 쉬고 있는 나사로의 손가락으로부터 떨어지는 물 한 방울로 그의 혀를 시원케 하기를 갈망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의 영혼만이 각각 천국과 지옥에 갔다면, 어떻게 영혼에게 눈, 손가락, 혀들이 있겠습니까? 죽은 시체가 무덤에 묻혀진 후에 천국이나 지옥 어느 곳으로도 옮겨지지 않음을 우리는 압니다. 중국과 이집트의 고대 왕실의 무덤에서도 여전히 시체가 발굴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사람이 죽으면, 종국에는 흙먼지가 되어 부활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자신도 예외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옥불에 대한 가르침을 주장하기 위해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지옥과 천국의 모습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의도의 초점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지옥에 대한 주제에 대해서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어느 곳에도 악인이 영원한 세대를 통해서 끊임없이 고통당할 것이라는 가르침이 없습니다. 오히려 악인들은 완전히 멸망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수많은 증거에 위배되는 내용을 가르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지옥에 관한 진리는 비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주제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몇몇 성경 절을 찾아봄으로써 보다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알아보기 전에, 우리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로마서 6:23). 모든 영혼에게 단지 양자택일의 두 길이 주어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놀라우신 희생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부활의 소망 없이 영원한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악인이 끝없이 고통을 당한다면,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고통스럽지만 영원한 삶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오직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악인이 받을 보상에 대한 분명한 성경 절들을 찾아 봅시다.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리로다 (시편 37-2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말라기 4:1).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28).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베드로후서 3:10).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1:8).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요한계시록 20:9).

이외에도 다른 많은 말씀이 인용될 수 있지만, 위에 언급한 성경 절들은 한결같이 악인의 최종적인 운명은 죽음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악인의 완전한 파멸을 서술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가장 격렬한 어휘를 쓰고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이러한 명확한 말들은 진리를 알기 위해서 진심으로 갈망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잘못 이해될 수 없습니다. 악인들을 위한 불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 불은 너무도 뜨거운 것이어서 그 불에 던져진 모든 사람들은 완전히 사라져서 없어질 것입니다.

영원히 타는 지옥불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가르쳐지고 있지 않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는 예수께서 지옥불이 영원히 타는 불임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교훈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된 비유 자체와 비유의 목적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셨던 배경과 실질적인 강조점을 놓침으로써,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안되겠습니다. 그분께서 가르치시려고 하셨던 교훈을 올바로 이해하여서, 우리 자신의 삶에 그것을 적용시킵시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 나타난 바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별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주위 사람들을 위한 순수한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영적인 유산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 그들을 가정과 교회로 초청하십니까? 만일 우리가 우리의 부유함을 사장시킨다면, 옛날의 유대인들처럼, 우리는 스스로 자만에 빠져서 파멸될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활동적인 사랑의 봉사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접촉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도 더욱 강하여질 것이며, 더 한층 의미가 부여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무서운 이야기로 만들지 말고, 그 대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요한복음 3:16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합시다.

참 고

어떤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20장 10절에서 사용된 세세토록(영원토록)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다른 유사한 성경 절에서, 이것을 단지 사람이 생존하는 한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1장 6절(영영히), 그리고 사무엘상 1장 22절과 28절(영영히), 그리고 요나서 2장 6절(오래도록-영원히)을 찾아서영영토록,영원히,영영히 등과 같은 표현들이 성경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를 찾아 보십시오.

영원토록이라는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 유다 7절을 살펴봅시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여기에서 영원한 불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영원한 불이라는 말의 의미가 영원히 불타고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완전히 타서 없어졌음을 표현하는 것일까요? 소돔과 고모라가 영원히 불타고 있다고 해석해야 한다면, 지금도 소돔과 고모라 도시는 중동지방에서 불타고 있어야 합니다. 영원한 불이라는 표현은 단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사전적인 의미보다는, 불로 인하여 완전하게 재가되어 사라져 버리는 결과가 영원하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비유의 의미

예수님은 사후의 육체적인 실체를 설명하기 위해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지 않으셨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비유를 통해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맡겨진 책임과 진리에 대한 청지기로서 유대인들과,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기별을 듣기를 열망하는 이방인들의 모습을 설명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사실상 누가복음 16장 전체는 청지기의 직분에 대한 것입니다.

16장 1절에서부터, 예수님은 금전이나 재산의 청지기 직분에 관한 또 다른 비유를 주셨습니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 지라. 물질에 대한 청지기 직분을 다룬 후에,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진리를 부여받은 문제를 다루고 계십니다. 또 다른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첫 번째 부자 청지기가 자신의 실질적인 부를 불충실하게 다룬 것처럼, 영적인 부활을 얼마나 불충실하게 취급하였는지를 생생하게 설명하고 계셨습니다.

posted by Jangjaed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