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College :: 제9호 참 그리스도인의 길을 찾아가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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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하나님의 뜻대로 배우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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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호 참 그리스도인의 길을 찾아가는 방법

제1부: 누가 진짜 그리스도인인가?

진짜 그리스도인?

요즘처럼 기독교가 인기 있는 시대는 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명함 한 장 지니듯이, 사람들은 자신의 사업을 위하여, 사교를 위하여, 명예를 위하여, 교회에 나가고 쉽게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리고 교인이 된 후의 편리함을 즐깁니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 곧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적당히 세상과 어울려 세상과 같이 사는 사람이 아니고,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가를 치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입니다.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아니면 어느 인간의 학설을 따르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좋은 대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모본을 따라 살기로 작정한 자들입니다. 세상을 살기에 편리한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또한 제시하여 주신 길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의 길과 세상의 길 사이에는 항상 투쟁이 있기 마련입니다. 믿는 자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일 때에는 동시에 예수를 자기의 주인이요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 안에는 예수를 자기 편리한 대로,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믿고 사는 가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차있는 이상한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기업이 되어 가는가 하면 어떤 교회들은 사회 친목 단체나 클럽처럼 변신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좌표를 다시 살펴 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과연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어떠한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일까요?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태복음 7:13,14.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은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일이란 참으로 많은 희생이 필요 되는 생애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기쁨과 즐거움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이 거듭나서 취미와 좋아하는 것들이 바뀌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생애를 살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쉽게, 그리고 편하게 사는 길은 멸망의 길이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로새서 3:1-3.

세상에서도 재미를 보고 하늘도 가겠다는 태도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길에는 중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적당히 믿는다는 사고 방식은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물려 받은 성경과 진리는 피 묻은 것들입니다. 얼마나 많은 선조들이 자기들의 생명을 바쳐가며 신앙과 진리와 그리고 표준을 고수하여 왔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빚진 자들입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는데 어떤 사람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누가복음 13:23.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궁금증은 한결같은 것을 보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란 어떠한 각오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아주 명료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누가복음 13:24) 라고 말씀 하시고는 길을 가시다가 뒤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을 향하여 다시 더 자세하게 이렇게 말씀하시었습니다.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여 다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14:25-33.

예수님을 따르라는 부르심은 아주 명백합니다. 예수께서는 따르기 전에 먼저 어떠한 대가를 치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제시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부모 형제 사이에 선택하여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먼저 선택하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정욕을 부인하고 예수를 따를 때에 자연히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따르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길입니다. 그 길은 어떤 의미에서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옛날에 십자가를 지는 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리스도인이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또한 주님의 축복 때문에 그것들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의 재산이나 시간이나 재능들은 모두 주님께서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따르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제자 됨의 대가에 대한 가르침이 타협되거나, 가르쳐지지 않고 망각되어 버렸을 때에 교회는 곤두박질 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세상 사람들과 교인들 사이를 구분하지 못할 만큼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한 청년이 사랑하는 애인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오! 내가 당신을 찾아 만나기 위하여서는 에베레스트 산보다 더 높은 산이라도 넘어 가겠고 태평양보다 더 넓은 대양이라도 헤엄쳐 가겠소! 오,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오!” 그리고는 그 편지 밑에다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추신 - 오는 수요일에 당신을 만나러 가겠소! 비가 오지 않는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하며 믿는다고 말은 하지마는 실상에 있어서는 적은 일들로 하나님을 부인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의 편안함과 세상의 재미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매일매일 예수를 배반하며 팔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들은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인 양 여전히 십자가를 자기 교회 지붕 위에 높다랗게 달아놓고 선전하며 살고 있지 아니한가요! 과연 우리는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인지 다시 한번 살펴 보아야겠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로 눈 앞에 두고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예비하는 생활을 살아야 하는 때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을 만나기를 예비하라”아모스 4:12. 우리는 하늘에서 거룩한 천사들과 이웃이 되어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초림하셨을 때에 그 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던 선지자 침례 요한도 회개의 기별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오시는 메시야를 마음속에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하여서 그들의 생애의 개혁과 부흥을 촉구하는 회개의 기별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사명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이렇게 예언해 두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누가복음 3:4-6, 이사야 40:3-5.

그렇습니다. 산처럼 높아져 있는 우리의 교만한 마음들이 낮아져야 합니다. 골짜기처럼 깊숙하게 들어가 있는 음흉한 마음들과 이기심들이 돋아져 평평하게 되어야 합니다. 타협하며 적당하게 살아가는 굽은 마음들이 곧바로 펴져야 합니다. 그리고 돌들과 파인 곳들이 많은 길처럼, 거칠고 모나며 세상의 잔재들로 가득 찬 성품들이 치워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시는 길이 평탄하여 지도록 말입니다.

침례 요한은 광야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요한이 침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누가복음 3:7-9.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똑같이 좋아하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듣고 웃는 농담들과 코미디 쇼들을 보면서 같이 깔깔거리며 웃고 있다면 우리들과 그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뒤늦을세라 유행 옷을 걸치고 다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을 단장하는 대신에 더욱더 예쁘게 보이기 위하여 짙은 화장을 하느라 많은 시간들과 돈들을 낭비하면서도 우리는 과연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자칭할 수가 있을까요? 속 사람을 단장하기 보다는 값진 패물과 장신구들, 반지, 귀고리, 팔찌, 목거리, 비싼 시계들로 몸을 치장하고 다니면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세상을 향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가 있겠습니까?

파티의 좌석에서 같이 술 마시며 담배를 피우며, 성경이 하지 말라고 분부한 일들을 같이 행하면서 어찌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수 있나요?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몸을 흔들게 하는 그러한 유행가를 따라 부르면서 어떻게 우리가 하늘을 가고 있는 성도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몸을 과다하게 노출 시키는 짧은 치마나 상의를 입고서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교회 문을 들어설 수가 있을까요?

그러한 옷 차림들은 예배드리는 자들을 위하여 디자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옷차림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세상 사람들이 남자들의 눈을 현혹하기 위하여 만든 옷들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성경의 표준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종교 개혁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곧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참된 회개를 촉구하는 제2의 침례 요한의 사역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는 또 다른 예수님의 호소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태복음 13:44-46. 보화가 감추인 밭의 값은 얼마였습니까? 백만불? 천만불? 아닙니다. 그 밭의 값은 그 농부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진주의 비유”에서 진주의 값도 마찬가지였다. 진리와 영생의 대가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됨의 대가는 자기의 옛 생애를 완전히 다 포기하고 예수님의 길에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문을 좁은 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가장 즐거운 길입니다. 그 길은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길입니다. 그 길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쉼을 주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워야 하는 길입니다. 진리를 발견하려고 헤매던 인간이,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만나고 나면 과거에 살던 죗된 길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신기루와 같은 세상이 제시하는 행복에 속임 당했던 자신을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그것이 거듭난 자들의 특징입니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영생의 길이 그렇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로새서 1:21,22) 라고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합세하여 우리들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사모하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 베드로 후서 3:10-12, 14.

값비싼 은혜를 찾아서 - 은혜의 진정한 의미 -

기독교인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은혜”란 단어일 것입니다. 죄를 용서 받기 위하여, 또는 축복을 받기 위하여, 또는 모든 것의 해결책으로“은혜”가 제시되고, 기독교인들은 진정한 은혜의 의미를 모른 채,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값싼 은혜를 남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은혜”란 단어는 진정한 반쪽의 의미를 잃은 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도시대 이후, 그리스도 교회의 성장과 함께 교회는 점점 더 세속화 되었으며, 은혜가 요구하는 대가에 대한 가르침도 점차 빛을 잃어버린 채 희미해져 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12제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진리는 중세기의 종교 암흑 시대에도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여전히 전수되고 있었습니다. 은혜란 그리스도의 초청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분의 부르심에 응하는 데에는 희생적인 대가가 지불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날마다 그분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애를 살았습니다. 비록 수도승 제도가 나중에는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의 대표적인 예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초창기의 경건한 수도승들의 동기와 목적은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교회에 들어오는 세속적인 정신과 값싼 은혜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는 파수꾼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행정과 정치를 맡아보던 성직자들과 신부들은 수도승 제도를 교회 조직의 타락한 모습을 가리우는 가면으로 이용하였던 것입니다.


루터의 부르심

종교 개혁시대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순수한 복음인 값비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수도승이었던 마틴 루터를 개혁자로서 선택하셨습니다. 그는 수도원 생활을 거쳐서 수도승이 되었는데, 이러한 모든 과정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완전한 순종의 길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애를 위하여 세상이 주는 장미빛 유혹들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마틴 루터 역시 수도원 생활을 통하여 개인적인 성취를 이룩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이 소수의 제한된 수도승들의 개인적인 성취나 공로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영적 눈이 열린 마틴 루터는 수도승 제도가 제자들의 소박하고 겸손한 봉사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공로를 쌓으며 극단적인 영적 교만으로 빗나가는 현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세속이 수도승들의 심장부에 찾아들자, 말할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되었습니다. 세상을 버리려고 하던 수도승들이, 이제는 수도원 안에서 세상을 그리워하는 미묘한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종교계가 이처럼 바닥까지 타락할 즈음,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주장하기 시작하자, 거의 모든 수도승들이 그에 대항하여 일어섰습니다.

루터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손을 뻗고 계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루터는 믿음의 손을 뻗어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지라도, 우리는 믿음으로 선한 생애를 살 수 있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하여 마련하여 주신 은혜는 값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은혜라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산산이 깨뜨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한번 더 그물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가 처음에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 그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버렸지만 자기 자신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남아있던 자아마저 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아를 버리게 되자, 그때까지 그를 붙잡고 있던 자신에 대한 신앙적인 평판도 하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스스로 공로를 쌓으려고 애쓰는 대신에,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에 응하라는 부르심에 순종하였습니다. 루터는 “그대는 지금까지 죄를 범해 왔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용서되었으니, 그대는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여 머물러 있으면서, 용서가 주는 위로를 즐겨라” 라고 속삭이는 사단의 음성을 거절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는 수도원을 떠나서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세상으로 돌아간 것은 세상이 선하고 거룩하기 때문에 돌아간 것이 아니라, 수도원도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돌아갔던 것입니다. 루터가 세상으로 돌아간 사건은 세상에게 가장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가 수도원에 들어갈 당시에 했던 세상의 포기는, 그가 세상으로 돌아왔을 때에 했던 자아의 포기에 비하면 어린아이의 장난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개심은 그 당시 종교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세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수도원이 안전한 피신처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날마다의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를 따르라”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 완전한 순종의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는 진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세상 사람들의 삶 사이에는 끊이지 않는 투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오해 받고 있는 루터의 믿음

어떤 사람들은, 마틴 루터가 깨달은 복음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제거해 준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치명적인 오해입니다. 그들의 오해와는 반대로, 루터는 세상에 살지만 세속에 대하여 결정적인 저항을 하는 그리스도인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거룩함에 이른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음을 설교하였으며, 세상에서의 삶을 통해서도 거룩한 경험을 지속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루터가 믿었던 신앙은, 하나님께서는 죄를 의로운 것으로 인정해 주신다고 믿는 신앙이 아니라, 죄를 버린 죄인을 의인으로 인정해 주심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그가 받아들인 은혜는 값비싼 은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죄에 대해서 용서를 가져오는 것은 자신이 힘들게 쌓아나가는 공로나 희생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로 베푸시는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고달픈 수도승 생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이전보다 더욱 엄숙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베푸신 값비싼 은혜를 깨달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위대한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걸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아들이 치르신 대가가 너무나 크기에 그것은 타락한 인류에게 은혜가 될 수 있으며, 그러한 엄청난 은혜를 바라보고 묵상하는 그리스도인마다 희생적인 대가를 치르면서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라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루터가 수도원에서 매우 참담한 경험을 하고 있을 때, 그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죄로부터의 자유와 용서를 붙잡게 되었습니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결코 극복할 수 없었던 죄를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의존하여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자, 그는 그러한 은혜를 베푸시는 그리스도께 이전보다 더욱 큰 헌신과 충성을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의 생애 전체를 대가로 지불하는 삶을 살도록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 일생 처음으로 그리스도께 완전하고 순수한 순종을 드릴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루터에게 있어서 사랑과 감사의 정신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완전한 헌신과 충성을 드릴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은혜는 그에게 그리스도 제자로서의 직분을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열성적인 제자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마틴 루터가 은혜에 대해서 깨달았던 바입니다.

루터는 오직 은혜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루터를 따르던 그의 후예들은 루터의 교리를 받아들였지만, 루터의 경험을 이해하는 일에는 실패하였으며, 루터가 했던 말만을 되풀이 하였습니다. 루터의 경험을 체험하지 못한 그의 후예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그리스도인들이 걷게 되는 제자의 길을 가르치는 일에 실패하였습니다. 물론, 마틴 루터는 오직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러한 설교나 가르침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과 배경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는 그 당시에 가장 열성적이고, 가장 엄격한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결심한 수도승들을 대상으로 설교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믿음을 하나님의 은혜를 향하여 돌리고자 했던 루터의 의도를 이해해야 합니다. 혹독한 규율과 엄격한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의무나 직분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 당시 루터는 수도승들에게 가장 적합한 설교를 하였을 뿐입니다.

루터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한 생애를 살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도록 만들 수 없으며, 오직“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만이 우리에게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그가 수도원을 나올 때, 즉 두 번째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응하면서 했던 말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루터는 엄청난 죄로부터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이와 같이 죄에 대한 보다 분명한 깨달음은 루터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더욱 열심히 따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은혜를 바라보았지, 방종과 게으름에 대한 핑계로서 은혜를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얻은 해결책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를 따르던 후예들은 루터가 발견한 해결책을 자신들의 경험으로 깨닫지 못하였으며, 은혜를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교리나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계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있는 값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값 싼 은혜가 가져온 재앙들

만일 은혜가 그리스도인 신앙 생활에 있어서 한낱 지식에 불과한 것이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곳을 가게 되며, 우리가 원하는 모든 죄를 범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가 우리의 죄를 덮어준다고 믿게 됩니다. 본성적으로, 사람은 가장 싼 값을 주고 은혜를 얻을 수 있는 장소를 찾으려고 합니다.

본성적으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마음을 만족시켜 주는 설교를 하는 목사나 교회를 좋아하게 됩니다. 마틴 루터가 말했던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말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신앙을 붙들게 되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이전의 상태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을 덮어주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은혜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교회는 깊은 세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교회와 세상 사이에 차이가 없어졌으며,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 사이에도 극적인 대조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처럼 이기적이고 위선적이며, 세상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 받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일주일에 한번씩 교회에 가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를 충분히 수행했으며, 그것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대량으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이 그리스도 교회에 가져온 참상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값싼 은혜가 그들을 제자로서의 의무와 직분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 나타나는 필연적인 대가를 면제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지식으로만 이해하는 값싼 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싼 값을 치르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값싼 은혜의 가르침이 만들어 놓은 결과들을 보면서 엄숙한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누가 값싼 은혜의 가르침 때문에 멸망으로 들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인가요?

매우 미묘하고 혼돈시키는 기만이 여기 있는데, 값싼 은혜를 믿는 사람들과 값비싼 은혜를 믿는 사람들이 공히“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잘못 이해하거나, 그것을 개인적으로 체험하지 못할 때,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크게 빗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해야만 합니다. 오늘날, 루터의 의도와는 달리 그의 말이 정반대의 의미로 해석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절망마저 느끼게 됩니다. 물론, 아직도 루터와 개혁자들이 가르쳤던 값비싼 은혜에 대하여 존경심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값싼 은혜의 가르침에 대항하기 위해서 일어서는 사람들은 극히 드문 것을 봅니다.

사람은 자신이 믿는 대로 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만일 우리가 값싼 은혜의 가르침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말하는 바대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값비싼 은혜를 믿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감사의 정신으로 대가를 치르면서 응답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은혜를 가장 값싸고 쉬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루터의 후예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그들은 은혜를 어떻게 하면 쉽고 간편하며 값싸게 만들 수 있을까를 위해서 골몰하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루터의 가르침을 지지한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된다고 믿는 사람들을 율법주의자로 보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서 희생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극단 또는 이단으로 정죄 받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기독교는 가장 인기 있는 종교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회로 개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기독교계에서 루터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목사들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성직자로 신뢰받고 있지만, 참된 제자의 직분에 대한 가르침은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지불해야 할 대가가 너무나 싼 값으로 책정되었으며, 값싼 은혜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값싼 은혜가 가져온 결과가 부메랑처럼 우리 자신들에게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속과 부정직으로 붕괴되어 가고 있는 커다란 교단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위선과 부도덕에 치를 떨면서 교회를 무시하는 세상 사람들의 코웃음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수많은 사람들을 도매 값으로 침례 주며, 회개하고 진리를 확신하는 일없이 구원받았다고 자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채워가고 있습니다. 마땅히 책망 받아야 할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죄를 가리워 줄 것이라고 위로하는 무책임한 성직자들의 숫자가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치지 않는 은혜의 샘을 퍼붓듯이 나누어 주고 있지만,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좁은 길로 들어가라는 설교는 점점 더 듣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초기 사도 시대의 교회에서 가르쳐졌던 그러한 진리를 어디서 찾을 수 있나요? 값비싼 은혜에 감격하여 자신의 목숨을 단두대와 화형 대 위에 던졌던 선구자들의 모습을 어디서 찾을 수 있나요? 기독교계 전반에 걸쳐서 내리고 있는 값싼 은혜의 재앙이 보이지 않나요? 바로 이것이 소위 복음주의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값싼 은혜를 가르친 결과로 내려진 재앙들입니다.

구원을 빼앗아 가는 값 싼 은혜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불순종의 생애를 살 수 있도록 교인들을 준비시키는 것이 값싼 은혜의 가르침입니다. 값싼 은혜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에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어중간한 사람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제자로서의 직분을 잃어버렸으며,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도구가 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말을 듣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지금 당신을 부르고 계신다는 말을 들을 때에 어리둥절하며 당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값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값비싼 은혜에 대한 진리에 대하여 눈이 가리워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깊은 기만 속에서, 그들은 값싼 은혜가 자신들을 구원하여 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들의 생애 속에서 제자로서의 의무와 순종의 삶을 이끌어 갈만한 실제적인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구원이 이미 모두 이루어졌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지 못하게 되며, 성령의 능력이 자신의 실제적인 생활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에 있어서 은혜에 대한 오해는 계명의 행함에 대한 오해보다 훨씬 무서운 재앙을 가져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값비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을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정직한 마음으로 대다수의 교인들이 참된 제자의 길을 걷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정통이라고 불리는 큰 교단에 다니는 교인들로 인정해 줄지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정직하게 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참 교회에 속한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제자 되는 직분(discipleship)”과 “은혜”사이에 존재하는 상관 관계를 반드시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는“무엇이 그리스도 교회를 이토록 참담하게 만들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분명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값 비싼 은혜 - 참 은혜

하나님의 참 은혜를 발견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만족과 평화를 마음에 담고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사단의 권세를 이기는 사람은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의 한량없는 은혜를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감으로써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자유를 만끽하게 될 것이고, 하늘 시민으로서의 확신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를 통하여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소식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제2부: 진짜 그리스도인의 길

진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처음 그리스도인이 될 때, 예수님을“받아 들이는(영접하는) 행위로써”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한다는 주장이 맞는 말이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기독교는 받아들임과 거부, 긍정과 부정을 모두 포함합니다. 이것은 회심하여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뿐만 아니라, 그 후에 신앙생활을 계속할 때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평생의 싸움을 다 마치고 본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날마다 이 진리는 적용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리스도가 미워하시는 것들을 모두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생활에는 부정적인 면도 있고 단점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단점이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부르실 때, 결코 쉬운 길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지금 전도할 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꺼리는 것들을 주님의 제자들에게 서슴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의 전도자들 중 주님처럼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13)라고 말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안타깝게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이토록 험하고 힘든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는 도덕적 능력 자체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도덕적 풍토는 우리 주님과 사도들이 가르친 엄하고 질긴 신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현재 종교적 온실에서 만들어지는 허약하고 깨지기 쉬운 성도들은, 과거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다가 죽어간 신자들에 비교하면 참으로 한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희생 없이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말할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유약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무엇인가 재미있는 것들로 즐겁게 해주어야만 교회에 나옵니다. 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죄를 미워해야 하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거부해야 하며, 선한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악한 길을 떠나냐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언제 깨달을 것인가요?

이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앞으로 전진할 수록, 그리고 높이 올라갈 수록 우리 앞에는 더 많은 어려움이 놓여 있고, 우리 영혼의 공격이 더 거세어진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어려움과 고난의 길을 즐거움으로 가며, 또한 그 고난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성령 충만한 삶이지만, 강도들이 창궐하는 숲을 통과하는 순례의 길이요, 마귀와 처절하게 싸우는 전쟁이다. 성령 충만하면 언제나 갈등이 있게 마련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본성과 사력을 다해서 싸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승리하는 방법은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진짜는 가시면류관 복음을 믿는다

이 세상에는 극소수이지만 생사의 문제처럼 필수적인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 하는 것은 바로 생사가 달린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으며,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오직 그분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세가지 아주 중요한 질문이 적용되어야 하고,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영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질문은, “객관적으로 제공된 구속이 어떻게 하면 주관적으로 받아들여진 구원이 되는가?”, 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일이 어떻게 내 안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그리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세 가지입니다. 이 중대한 질문에 대해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그리스도를 당신의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여라”,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세 가지 답을 내 놓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대답들은 사실 다 동일한 것입니다.

요즈음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영접”을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여깁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게으릅니다. 그래서 신앙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할 때 가장 쉬운 길을 택하려는 쪽으로 기울어지며, 그리하여 “그리스도 영접”을 만병통치 약처럼 사용하여 보편적으로 적용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순간적인 마음의 충동에 의해서, 고통이나 손해 없이, 평상시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수고 없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태도는 생사를 가르는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일 과거에 이스라엘 민족이 유월절의 피를“받아들인(영접한)”후에 계속해서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겠다고 고집했다면, 탕자가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들인(영접한)” 후에 계속 먼 나라의 돼지들 틈에서 생활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려면 거기에 따르는 행동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뜻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험은 아주 독특한 경험으로서, 이 연합은 지적인 측면, 의지적인 측면, 그리고 감정적인 측면을 포괄합니다. 지적인 면에서 신자는 예수님이 자신의 주시요, 그리스도라고 확신합니다. 의지적인 면에서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결과 감정적인 면에서 그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오는 큰 기쁨을 누립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주로 인정하는 데는 많은 혁명이 따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일부분만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의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분 이외의 다른 것들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신앙은 그리스도의 친구들을 우리의 친구들로, 그리스도의 원수들을 우리의 원수들로, 그리스도의 방법들을 우리의 방법들로, 그리스도의 거부하시는 것을 우리가 거부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의 십자가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으로, 그리스도의 미래를 우리의 미래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솜사탕처럼 달콤한 복음”을 제시하면서 산허리 양지 바른 곳을 약속하는 것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속이는 것입니다. 소위 “쌀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은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복음을 제시할 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교회들에서 많은 “쌀 크리스천”들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약속하시나요? 그분은 죄 사함, 내적 청결, 하나님과의 화평, 영생,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 유혹의 극복, 부활, 영화롭게 됨, 하나님과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처소들을 약속하십니다. 이런 것들은 영적인 축복이지 물질적인 것들이 아닙니다.

진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믿기 때문에, 그 승리에 참여하기 위해서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요구되는 가시 면류관도 달게 받습니다. 반면, 가짜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아무런 극기도, 희생도, 자아부인도 요구되지 않는 솜사탕 같은 편안한 신앙의 길만이 좋을 뿐입니다.

진짜는 주님의“일” 보다“주님”에 우선 순위를 둔다

그리스도인은 사고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마음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지배하고 인도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기도를 열심히 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 세계에 대한 그의 반응은 그리스도의 반응과 동일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처럼 생각합니다. 이렇게 될 때 모든 삶이 달콤하게 변합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프랑소와 마라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오직 나밖에 없는 것처럼 언제나 나를 생각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나에게 하나님밖에 없는 것처럼 언제나 하나님만을 생각할 때 비로소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겨우 보답하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 사물들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고에 비추어서 생각해야 합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사고하지 않습니다. 그의 사고는 먼저 하나님께 갔다가, 그분에게서 다시 그분의 피조물로 나아갑니다. 하늘을 향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하늘을 향하는 사고를 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성화되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고들을 주관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

시대와 다양한 교리적 강조점들을 초월하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지한 열망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자주 오랜 시간 묵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려면 우선 건전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기록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떠나서 그분을 찾는 것은 아무 소득이 없을 뿐 아니라 위험합니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 중에 위대한 성자들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는 무엇인가요? 확신하건대 적어도 부분적으로 그 원인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일에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활동주의의 희생자?

그리스도인은 안타깝게도 잘못 이해된 “활동주의”의 희생자들입니다. 누군가 표현했듯이, 소위 “일(work)의 복음”이 교회 안으로 밀고 들어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밀어냈습니다. “주님의 일”을 이루려고 하는 중에 종종 우리는 “일의 주님”과의 접촉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사람들을 탈진시킵니다. 자신들의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라고 자랑하는 목회자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주간과 야간의 여러 집회들과 행사들을 적어놓은 달력을 그 증거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목회자와 교인들이 잘못된 철학의 인도를 따르고 있음을 말해 줄 뿐입니다.

만일 지금 많은 교회들에서 이루어지는 활동들이 죄인을 구원하고 신자를 온전케 한다면, 그것은 큰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고독과 침묵의 열매들을 많이 맺을 수 있도록 시간을 할애하는 방향으로 교회의 활동들이 재편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시끄럽고 분주한 활동들이 다 중지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될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신앙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진짜 신령한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이 남보다 더 거룩하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행복에 대한 갈망”은 실상 그들이 거룩하지 않다는 충분한 증거입니다. 정말로 신령한 사람은, 기쁜 일이 생겨나도 교만해지지 않을 정도로 성숙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쁨을 부어 주신다는 것을 잘 압니다. 존 웨슬리는 초기 감리교 단체들 중 한 단체의 구성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사랑 안에서 온전해진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떻게 하면 거룩해질 수 있는지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종교를 즐기기 위해 교회에 오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스스로 고난과 수치를 당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신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며, 늘 그분의 영광을 갈망합니다. 역경과 환난은 의인과 악인에게 모두 찾아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르지만, 사실 “십자가”라는 것은 우리가 굳이 당하지 않아도 되는 환난을 그리스도를 순종하기 때문에 당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기를 선택함으로써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고, 그리스도의 주권적 지배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영성이 깊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보고, 하나님께서 단지 표면만 아니라 본질을 꿰뚫어 보고 평가하시듯이 그것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의 표시입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 보기 때문에 그에 따라 우쭐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곤란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기를 고집합니다.

신령한 사람의 특징은 옳게 사는 것을 택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은 세상에 대해 초연한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며 집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이 땅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남은 인생을 가치 있게 살며,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여생의 길이를 결정하시도록 맡기고 평안을 누리며 삽니다.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특징은 다른 사람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자신은 주목 받지 못해도 그들이 향상되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의 마음에는 시기심이 없습니다. 그의 형제들이 영예를 얻을 때 그는 기뻐하는 데,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그 뜻이 그의 지상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 그도 역시 기뻐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보다 높아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그는 자신의 낮아짐을 얼마든지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무료 교환

기독교의 교리의 뿌리는 “대속의 교리”입니다. 대속은 죄인들의 죄가 구주에게 전가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의를 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이 진리를 믿도록 강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것을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진리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런 시작 이후에 거의 모든 것은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교환하는 과정의 연속입니다. 죄가 의로 바뀐(교환된) 다음에는 “진노”가 “받아들임”으로 교환됩니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교환은 죽음과 생명의 교환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방법과 다릅니다. 그분은 기존의 것들을 꿰매어서 좀 더 좋은 것으로 만들어내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인간을 새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인간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분은 새 생명을 주시고 옛 사람을 파괴하는 작업에 착수 하십니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 그리스도인은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교환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사실, 가장 강한 상태에 있는 가장 순수한 성도조차 그의 회심 전과 마찬가지로 약합니다. 회심을 통해서 일어난 변화는 단지 미미한 인간의 자원이 아닌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그는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교환했습니다. 물론 그 교환 후에도 그 “강함”은 그의 것이 아니다. 그 “강함”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그에게 흘러 들어온 것일 뿐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기본에 충실하다

세상을 살다 보면 참과 악을 구별하기가 참으로 힘들기 때문에 오류에서 완전히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생각(판단)과 행동이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민한 영적 식별력을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런 혼미함에서 구하기 위해 마련해 주신 모든 수단들을 충분히 이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 수단들은 기도, 신앙, 꾸준한 성경말씀의 묵상, 순종, 겸손, 진지한 사색, 성령님의 조명입니다.

올바른 기도와 성경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믿는 신앙, 또 깨우침과 지식을 주는 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또한 겸손은 아주 중요하며, 교만하면 진리를 떠나기가 쉽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색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색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많은 진리가 저장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들은 진지하고 사려 깊은 사람들일 것이라고 당연시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내적 조명이 없는 사색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위험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주셔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결코 그분 없이 살아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변화를 믿는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성품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신비로운 힘이 시간에게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그리스도인이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 세월이 흐르면 그가 언젠가 거룩한 사람으로 변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바보를 현인으로, 죄인을 성자로 만드는 것은 “시간” 이 아니고 “변화” 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변화를 일으키시기 때문에 그들이 변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박해자 사울이 변하여 하나님의 종 바울이 된 것은 시간이 만들어낸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그 변화를 이루신분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젊었을 때 충동적이고 고집 센 사람이 노년에 모세나 야곱처럼 변화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세월이 그런 변화를 가져왔다고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변화를 이룬 것입니다. 많은 죄인들은 구원의 날을 미루면서, 언제까지나 시간이 자기의 편이기를 막연히 바랍니다. 그러나 그가 실상 그리스도인이 될 가능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아야 합니다.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고 악한 길을, 불의한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와 회개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하고, 진정한 성품의 변화를 얻고 성령의 충만하신 열매를 생애에 맺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처음 믿을 때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된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의 삶이 영적인 완전함을 향해 항상 전진하는 변화들을 겪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매일 체험하며 사는 변화 있는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Jangjaed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