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호 어떤 영의 은사를 구하십니까?
제1부: 기적과 은사를 구하십니까?
서론
봄 방학 때였습니다. 경수는 휴가를 보내기 위해서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집에 가는 일로 매우 기분이 들떠 있었는데, 왜냐하면 카톨릭 신자이신 어머니가 최근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기도회에 참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경수는 드디어 어머니와의 신앙 장벽을 없애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친교를 나누게 된 것을 무척 기뻐했습니다. 집 현관에 도착하자,“주님 감사합니다”라는 어머니의 기쁨에 찬 탄성이, 여행에 지친 피로를 씻어 주는 듯 했습니다. 그렇게 달콤한 말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날 밤, 피곤하긴 했지만 어머니와 함께 기도회에 참석하는 기쁨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경수는 어머니와 다른 교우들이 번갈아 가며, 찬미하고 서로 간증을 나누는 것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믿음과 순복에 대한 권면을 주고 받으며, 죄의 고백과 감정이 넘치는 기도들과 위로 뻗은 팔과 같은 것들은 대체적으로 성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사람들이 방언을 하기 시작하였고,“하나님의 성모 마리아가 이렇게 말씀하셨으니......”하는 통역이 뒤따랐습니다.
경수가 겪은 일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문제를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영적 선물의 확실성을 진지하게 믿고 있기 때문에, 방언하고 예언하며 병고치는 초자연적 현상들이 전혀 거짓일 가능성을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물론 그들 역시 하늘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모든 현상들을 다 인정하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자신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그러한 원칙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아주 멋있게 포장된 꾸러미일지라도, 그 속에 선물을 담고 있을 수도 있고, 아무 것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좋게 포장된 것이 다 좋은 선물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속에 부비트랩(작은 폭탄의 일종)이 들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영적 은사라고 불리워지는 감정적 환희의 모습 뒤에 혹시 무엇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매우 중대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참 선물이나 은사는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고린도전서12:11)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복음사업을 위한 당신의 뜻에 따라서 각 사람을 선택하여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인간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당신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서 준비된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라는 성경적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진지하게 묻습니다.“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29,30절). 대답은 분명히 “아니오!”입니다. 따라서 어떤 기적이나 은사도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나 구원을 평가하는 특별한 은혜의 증거나 시험기준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태복음 7:20)고 말씀하셨는데,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라디아 5:22,23)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자주 교회는 물론 개인들도, 무슨 특별한 은사가 어떤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느냐에 따라서 서로를 판단합니까?
제2부: 기적이 모두 성령의 역사인가요?
서론
성경에 계시된 가장 분명한 마지막 시대의 징조 중의 하나는, 모든 영혼들의 운명을 종결 지을 최후의 전쟁을 위해서, 사단의 세력이 가시적으로 출현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마지막 투쟁을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하는데, 이 전쟁에서 하나님과 사단은 마지막 대 쟁투를 벌이게 될 것이며,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선악의 대 쟁투는 결국 여기서 막을 내릴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사단은 세상 전체를 자기 진영으로 끌어 들이는 기만적인 작전을 펼치기 위해서 온갖 교활한 방법을 동원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여....내려갔”다고 말했습니다(요한계시록 12:12). 6000년 동안이나 준비해온 이 전쟁을 위해서, 원수는 정치적 세력과 종교적 힘을 모두 이용할 것입니다. 머리가 비상한 사단은 사람들을 구원 받지 못하게 하는 전략을 지금까지 세워왔습니다. 그의 최종적 목표는 사람들로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인데,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에 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오직 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죄를 “불법(법을 범함)”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요한일서 3:4). 바울은 좀 더 명확히 설명하기를, 죄는 십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로마서 7:7). 그렇다면, 마지막 대쟁투의 초점이 하나님의 도덕률에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에 맞추어질 것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단은 하늘 정부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존재 입니다. 오래 전부터, 그는 하나님을 불공정한 요구를 하시는 분으로 비난함으로써 하늘의 평화를 깨뜨려 놓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도무지 지킬 수 없는 율법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시는 부당한 분으로 비난하였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부터, 그는 자신의 비난의 말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을 범하게 하려고 계속해서 노력해 왔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단에게 있어서 별 문젯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거대한 종교 집단들을 어떻게 자신의 불순종의 계획에 참여시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최후의 기만을 위한 그의 거대한 전략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심지어 종교계까지 하늘의 권위를 대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교파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범하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도록 만들어야 하며,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상태에 살면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는 열심을 내도록 기만해야 합니다. 사단의 이러한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단은 신앙 문제에 있어서 성경을 최종적인 권위로 받아들이던 전통적 견해를 무너뜨리고, 그에 걸맞은 다른 권위를 확립하려고 할 것입니다. 자신의 계략 안에 모든 교회와 모든 신앙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다 포함시키기 위해서, 각 교파들이 주장하는 교리나 예언 해석 법이나 생활 표준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의 시선과 생각을 연합시킬 수 있는 어떤 계략이 고안 되어야 합니다. 사단은 교파간에 어떤 견해 차이를 가져올 수 있는 전략을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사단이 원하는 방향으로의 연합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각 교파 단위의 분열이나 불일치를 가져올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기독교 전체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하도록 유도하는 놀라운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네 가지 기본적 요구가 충족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범하면서도 안전 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하며,
진리와 오류를 시험하는 시금석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게 만들며,
진리의 말씀 대신에 진짜처럼 보일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만큼 흥미 있는 다른 기준을 제시하며,
비록 진리라고 할지라도, 모든 그리스도인들 간에 불화를 초래하는 교리나 예언 해석, 그리고 그리스도인 표준들을 무시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십계명)을 불순종하도록 그리스도인들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요소들이 사단의 거대한 책략 속에 잘 짜 넣어져야만 합니다.
기적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증표인가?
자, 이제 마지막 시대에 이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에 관한 영감의 기록들을 살펴보십시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대 기만자인 사단은 자신의 속임수를 통하여서 그의 목적들을 성공적으로 달성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불순종할 것에 대해서 경고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주의해 보십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내 아버지의 법을 범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주님께서 하신 이 경고의 말씀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성경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자처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예언하고 병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엄청난 능력을 행사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기적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행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그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그런 영적 은사들을 행사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들에게 초자연적 능력을 주어서 그런 기적을 행하게 하였습니까? 그러한 능력이 나올 수 있는 근원은 하나님과 사단 이외에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들이 불법의 창시자 사단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고 예언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 때에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처럼 보이는 기만적인 기적들이 있을 것임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그것들은 정말 참된 은사와 똑같이 보일것이며, 신앙의 열성이 지극한 분위기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 은사와 거짓 은사의 차이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는 이 점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주여, 주여”라고 부르짖는다고 할지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 하늘 아버지의 뜻입니까?
다윗의 말을 들어 봅시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시편 40:8). 자신들이 행한 놀라운 기적들을 근거로 예수께 구원을 호소한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생애를 살았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사단의 대리자”라는 책망과 거절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기만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불렀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사랑한다고 말하였지만, 예수의 입에서 나온 말씀과 진리에는 순종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분을 아는 것은 곧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는 요한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요한일서 2:3,4). 사실상, 그들은 진심으로 예수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곧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한일서 5:3).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성령을 받게 됨
이러한 사실들은, 오직 순종하는 자들만이 성령 충만해질 수 있다는 진리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자들의 생애에는 영적 은사가 나타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한복음 14:15,16).
이 말씀들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사랑은 순종을 낳고 순종은 성령충만을 가져다 준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순종과 성령의 침례 사이의 관계를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사실은, 성령은 믿는 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죄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4:26).
다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요한복음 16:13).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모든 진리 또는 모든 것”이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첫째로 하시는 사업은 죄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6장 8절에 성령의 사역을 묘사해 놓으셨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가 무엇입니까? “죄는 불법(율법을 범함: 영문성경)이라” (요한일서3:4). 어떤 사람도 자신이 율법을 범한 일에 대한 성령의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성령 충만의 체험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거짓말, 도둑질, 간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일 등은 성령 충만한 삶 속에서는 있을 수 없는 죄들입니다. 이러한 죄들을 의도적으로 행하고 있으면서 성령의 역사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고의적인 죄와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거리가 먼 것만큼이나 거리가 먼 것입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성령을 거역하면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에 이르게 된다는 두려운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2:31,32).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우리를 이끌고자 하실 때, 성령의 지도와 책망을 거절하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영감의 말씀을 기록하면서 이 원칙을 잘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사도행전 5:32).
이제 우리는, 기적을 행하였던 자들을 예수님께서, 왜“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배척해 버리셨는지에 대한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능력을 요구하였지만, 하늘 아버지의 뜻과 그분의 율법을 거절하는 삶을 살았으므로,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사단이 끼어들어서, 성령께서 행하시는 기적처럼 보이는 기적을 산출해 내는 능력을 그들에게 공급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그들은, 그들의 불순종을 책망하시는 성령을 슬프시게 함으로써 결국 결정적 기만에 빠져들게 되었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는 것에 대한 감각을 잃어 버렸던 것입니다. 사단의 영이 그들의 감정을 자극하였고, 이로 인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기초로 하는 대신에, 자신들의 감정에 기초하여 계속해서 거짓된 종교적 능력을 행사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기적 행사를 성령의 능력이라고 주장하는 현상들이 일어날 것이지만, 사실 그들은 사단에 의해서 이용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경고하여 주셨습니다.
오늘날의 놀라운 성취
오늘날 세상에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종교계를 불순종의 거대한 책략으로 몰아넣기 위한 4가지 기본적 조건들을 충족시키고 있나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드리기 전에, 저는 최근에 어떤 사람들을 그룹으로 성경 공부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겪었던 경험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그 성경 연구 반은 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3명의 사업가와 그 부인들이, 매주 목요일마다 성경의 원칙들을 탐구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그 공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이례적이었습니다. 우선, 그 세 쌍의 부부는 모두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처럼 보였습니다. 함께 공부하는 중에 가끔씩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이 체험한 사랑의 경험들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관계를 자신들의 감정적 느낌을 근거로 하여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이례적인 사실은 진리가 그들 앞에 공개될 때마다 열렬한 태도로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안식일 문제라든지 죽은 자의 상태, 또는 부정한 음식 등이 설명될 때마다 그들은 진심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계속해서 그들은 그 문제들의 정확성을 시인하였고, 자신들이 왜 이런 것들을 깨닫지 못했었을까를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성경 공부의 마지막 날, 저는 그 사람들에게 함께 안식일을 지키기 시작하자고 권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 중 아무도 자신들이 그토록 성경을 통하여 확신하였던 진리의 말씀들을 순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더욱 당황하게 만든 것은,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였을 때였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우리가 할 일들을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한다면 기꺼이 지킬 것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이 성경에 있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기 전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셔야 합니다”라고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하였습니다. 나는 이미 성령께서 성경말씀을 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므로, 더 이상 성령의 뜻과 계시를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그분께서는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다른 말씀을 하심으로써 성경과 어긋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하였지만 허사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17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성령의 검”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성경 자체가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담당하는 칼날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도 성경을 보지 않고서는 진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감정적 느낌을 선호함으로써,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성경의 말씀을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타당하게 보이는 다른 시험 기준을 선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합리화시키고 미화하는 다른 영의 말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이 모든 것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대단히 사랑한다고 자처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보는 환상이나 계시를,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애 속에 특별히 임재하시는 증거로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경 말씀보다 자신들의 경험을 더욱 신뢰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높여야 된다고 수없이 공언하였지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순종하기를 계속해서 거절하였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그들에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제가 그들처럼 황홀한 기쁨이나 평화의 은혜를 받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저를 측은히 여기는 듯 바라보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마태복음 7장 21절,22절에 하신 말씀과 똑같은 현상임을 느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정말 자신들의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은 행하지도 않으면서 “주여, 주여”라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졌다고 주장하는 모든 성령의 은사들은 예수께 서 인정하시는 자들이 갖는 것과 유사한 것들이었습니다: 귀신들을 쫓아 냄, 예언, 병고침, 방언, 기적 등. 예수께서는 마지막 때에“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런 기적들을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진리대로 순종하며, 생애 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지만, 예수의 진리인 성경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어느 곳을 가든지 수많은 사람들이 교파의 장벽을 초월하는 이런 움직임들에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카톨릭 신자나 개신교 신자나 할 것 없이 모두 이러한 영의 활동에 감동되어 사로잡혀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 성령이 자신들에게 임하여서, 그들이 방언이라는 영의 언어를 말하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에게 임하여서, 병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내며 예언을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경고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는 참된 은사와 거짓 은사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는 어떤 기적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가짜를 식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느냐 또는 불순종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이 행하는 “큰 표적과 기사”들이 너무도 기만적이기 때문에,“택하신 자”들까지도 그 기적들에 의해서 거의 압도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마태복음 24:24). 요한은,“귀신의 영”이“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그들을 모으”는 것을 보았습니다(요한계시록 16:14). 이 귀신의 활동들의 영적인 의미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마지막 시대의 거짓 영들은 진리의 사역자임을 자처하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의 옷을 입고 일할 것입니다. 바울은, 실제로“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에 대해서 말했습니다(고린도후서 11:15).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는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라고 묘사했습니다(데살로니가후서2:9,10).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이 성령의 능력을 너무도 흡사하게 가장하므로, 대부분의 세계와 교회들이 사단의 기만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놀라운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오직 사랑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들만이 이러한 기만으로부터 보호될 것이라는 예언을 말하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기괴한 일들과 구경거리가 편만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쳐준다는 약속, 기적 같은 언어 능력, 방언들, 심령술 등에 매혹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또는 사단에게서 오는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짓 기적에 관해서 예언한 영감의 기록들을 주의 깊이 살펴보지 않음으로써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가지고 설교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진지한 태도와 열성에 감동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느낍니다. 그들은 기적들을 성경으로 시험하기보다는, 아무런 저항 없이 감정의 무아경에 빠집니다.
제가 성경을 지도해준 그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저는 사단이 종교계를 자신의 진영으로 낚아채 가는데 필요 되는 4가지 기본조건들이 그들에게 잘 부합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면서도 안전함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영을 분별하고 진리와 오류를 판단하는 최종시험 기준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할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인정하신다는 확증을 얻기 위해서 다른 시험 기준(즉, 자신들의 감정)을 정하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가납하심의 증거를 기적의 은사에 두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직접 확인한 놀라운 교훈과 예언의 진리들을 그들의 종교적“경험”보다 덜 중요한 부수적인 것으로 일축해 버렸습니다. 천주교도, 침례교도, 오순절 교도, 장로교도였던 그들 모두가“영”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성서의 가르침이나 교단의 입장을 기꺼이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숭배하는 사람,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 죽은 자와 대화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는 그런 영은 도대체 무슨 영입니까? 분명한 사실은, 그것은 하나님의 영(성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오직“자기(하나님)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5:32).
성령 침례의 목적
성령의 침례에 대한 가장 중대한 진리가 종종 간과되는데, 이 문제는 성령의 침례의 목적과 관련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어떤 개인적 무아경, 감정, 내적인 신령한 행복감 등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믿는 사람들은 약속된 성령의 부으심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령 침례를 받은 결과로 그러한 느낌을 개인적으로 가질 수는 있지만, 결코 그러한 느낌이나 감정이 성령 침례를 받는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 그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몇 날이 못되어”(사도행전 1:5) 성령이 임하기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씀하신 후, 그들에게 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1: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약속을 통해서, 성령께서 그들에게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증인”이란 자신이 먼저 알고 있는 무엇을 다른 사람에게 말해 주는 사람입니다. 제자들은 메시야를 목격해온 자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무엇인가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보존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일에 있어서 완전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을 강력한 증인으로 만드심으로써, 그들의 가르침을 받은 영혼들이 수확될 수 있도록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성령의 침례가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느낌이나 황홀함을 줄 것이라는 암시를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령의 침례는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확신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요, 그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는 지도를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에서 약속된 성령을 기다렸으며 오순절이 되자 드디어 성령이 퍼부어졌습니다. 그들은 어느 집에 함께 모여 있었는데, 거친 바람 소리와 함께 하늘이 열리는 듯 하더니 불의 혀가 번쩍이며 그들 각자에게 임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대로 약속된 축복이 내렸습니다. 그들이 영혼들에게 접근하여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서 하늘의 능력이 그들 위에 임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그들이 능력을 부여 받았고 또 자격을 얻었습니까? 예루살렘과 유다와 땅 끝까지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기 위해서 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사도행전 2:9~11은, 성령 충만한 제자들이 증거 활동을 시작하기 위해서 집을 나섰을 때, 16개나 되는 다른 나라의 말을 그들이 구사했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성경을 읽어봅시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4). 놀란 청중은 자신들의 귀를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리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in his own native language)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사도행전 2:6-8).
사도 바울은 참된 방언의 선물이 어떤 것인지를 단순하게 묘사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아경의 상태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늘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었던 실제 언어였으며, 여러 종족 사람들이 다 각기 자기들의 모국어로 전파되는 복음을 들음으로써 진리를 깨닫고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믿지 않는 이방인들과 접촉할 필요가 있을 때, 이 방언의 은사가 계속 작용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떤 경우는 언어의 장벽을 깨기 위해서 그것이 필요 되었고, 또 어떤 경우는 이방인들이 유대인 중심의 그리스도 교회로 개종하는 것을 허락하는 표로서 그것이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44-47절에서, 우리는 베드로를 통해 처음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는 동안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을 때, 유대인들은,“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랐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이“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에게 침례 주는 것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이방인들이 했던 방언을 오순절에 있었던 방언(이해할 수 있는 실제적인 언어)과 동일시 하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형제들에게 그 일에 대해서 보고하기를“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셨다고 말했습니다(사도행전 11:15). 이것은 분명히 오순절에 있었던 방언의 경험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5~7절의 방언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은, 이방 종교의 영향으로 인해서 사도들의 노력이 무산될 위험에 처해 있는 고린도의12명의 작은 교회(7절)에 성령의 은사가 주어졌던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에 주어졌던 방언 은사가 오순절에 나타났었던 방언의 은사와 동일한 종류의 것이었음을 의심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가면서, 고린도 교회에서는 커다란 혼란을 일으킬 정도로 방언의 은사가 오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첫 편지서의 한 장을 이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서 써야 할 정도로 염려하였습니다. 영적으로 약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많은 문제들이 사도들을 괴롭혔습니다. 고린도는 항상 개심자를 얻기가 힘든 곳이었으며, 새 신자들의 마음 속에서 부패한 이교의 영향을 지워버린다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곳은 영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종종 그 교회에게 간절한 호소의 편지를 보내곤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방언 문제가 제기되어 있는 고린도전서 14장을 살펴봅시다. 이 장의 성경 구절들 중의 절반 이상이 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바울은, 언어는 서로 대화를 나누며, 이해시키고, 배움을 주며, 가르치기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말의 은사를 올바로 쓰고 있지 않았습니다. 여러 번 반복하여 바울은, 방언이 야만인과 믿지 않는 자들, 또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사용되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청중들이 사용하지도 않으며, 알아들을 수도 없는 외국어를 말함으로써 큰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른 방법으로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어떤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할 목적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방언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방언을 해석하는 일도 통역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구절들이, 처음 오순절에 있었던 방언의 목적 즉 복음을 증거하는 일과 전달하는 일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4절,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절,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6절,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지식(을)....말하지 아니하면”
7절,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8절,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9절,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0절,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절,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12절, “너희도...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13절,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절, “나의 마음(이해, 영문 번역)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15절, “마음(이해, 영문 번역)으로 기도하며”
16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17절,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9절,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20절,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22절,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23절,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6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27절,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절,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30절,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 지니라”
31절,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33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34절,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35절,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40절,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방언이 어떤 무아경 상태에서 말하는 것이라는 근거를 찾기 위해서 이 장을 읽는 사람은 자신들의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을 두어 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절들은 14장 전체의 문맥 속에서 연구되어야 할 것이며, 실제적인 외국어를 염두에 두고 연구해야만 이 모든 구절들이 조화 있게 이해될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의 주장은 “방언은...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22절)라는 논점을 기초로 성립된 것입니다. 오순절에 사도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았던 것도 언어가 다른 이방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받았던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몇 가지 질문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고린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거나 예배 드리고 있는 중에 큰 소리로 방언함으로써 무질서와 혼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분명히 이해할 수 없는 상태의 말, 다른 사람의 덕을 세우지 못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특별히 축복을 받아 방언을 말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을 높이는데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고린도전서 14장을 근거로 할 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예”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교회의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방언을 말하게 하실까요? 아니오, 성령은 그런 목적으로는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린도교회의 무지에 대해서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요? 그 연약하고 미숙한 교회의 교인들은 오순절에 있었던 방언(각 나라 사람들이 자기 고향의 언어로 알아들었던 실제적인 언어) 이 나타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방언이 복음사업에 있어서 외국인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기적적으로 주어지는 은사임을 잊어버리고, 외국 말이면 무엇이든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의 증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방언의 오용을 막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을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외국어를 할 줄 아는 것처럼 교회에서 큰 소리로 말하면서 펄쩍펄쩍 뛰곤 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는 어떤 사람들도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것이며, 점잖치 못하고 무질서한 광경들이지요. 심지어 어떤 여자들은 괴성을 지르면서 큰 혼란을 일으키곤 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33,34,40절).
그들이 받은 은사가 성령의 능력에 의한 무아경의 발설이었다면, 바울이 그 여인들에게 잠잠하라고 말했겠습니까? 아마 그렇다면, 바울은 성령에게 잠잠하라고 명한 죄를 범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28절에 있는 바울의 명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만약 말하는 자가 성령의 지도를 받아 하늘의 언어를 말하고 있던 것이라면, 어떻게 그런 명령에 교인들이 순종하겠습니까? 바울은 듣는 자들에게 덕이 되고, 그 의미를 밝히 전달해 줄 수 있는 통역자가 없다면, 방언을 하지 말 것을 권면했습니다.
오늘날의 방언은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방언보다 좀 더 혼란스럽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당시의 상황과 아주 흡사합니다. 실제적인 언어를 말하는 대신에 세상의 어떤 언어와도 관련이 없는 시끄러운 소리들이 공중에 가득하게 날립니다. 심지어 누가 그 소리들을 통역해보아도 그 내용 속에 별다른 기별이 없고 의미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으로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그리고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한국말이나 영어로 말해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 왜 존재하지도 않는 이상한 언어와 통역을 통해서 기별과 진리를 전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도무지 논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또한 성경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방언의 은사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일진대, 그 정확성에 대해서 전혀 객관적인 테스트를 하지도 않고, 전적으로 통역자 한 사람의 성실성에만 의존하여 교인들에게 진리를 전달한다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마지막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방언의 풍조가 성경의 중요한 두 가지 진리의 표준에서 빗나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성령의 침례는 하나님의 진리와 계명들을 모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오늘날의 일반적 방언의 횡설수설하는 것은, 믿지 않는 자들을 지도하고 그들의 덕을 세우기 위한 방언 은사의 참 목적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백만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불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 사단은 사람들의 감정과 느낌을 파고 들어서 그들을 깊이 기만하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이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성령과 가납하심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사람들에게도 임할 수 있다고 믿도록 유도되고 있습니다. 사단이 환상 속에서 주는 번쩍 번쩍하는 빛이 하나님의 불꽃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습니다. 세상은 진리보다는 기적에 더 높은 가치를 두도록 세뇌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시대에 악한 영들이 모든 기독교인들과 세상 사람들을 완전하게 속일 수 있는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에는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위에 두는 그리스도인만이 사단의 기만을 피할 수 있습니다.
다음의 질문들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대는 성령의 은사를 구하기 전에, 성령의 9가지 열매인 사랑, 희락,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자신의 성품과 생애 속에 충만하게 맺히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는가?
성령의 열매들이 충만하게 맺히지 않은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의 능력이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대는 안식일 계명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십계명과 진리를 고의적으로 부인하거나 거절하는 사람에게 성령의 능력과 은사가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부인하는 사람도 성령의 침례를 받을 수 있다면, 아무나 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 그것을 받아서 이기적이거나 무례하게 사용할 만큼 성품이 변화되지 않은 자들에게도 주어진다고 생각하는가?
방언이 주어지는 목적이 무엇인가?
신앙적인 만족감인가? 아니면 언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전도인가?
한국 사람이 한국 청중들에게 설교하는데, 방언을 사용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들에게 설교하는데, 통역을 두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방언을 하는 사람 자신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며, 듣는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묘한 상황이 성경적으로나 이성적으로 또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는가?
그대는 하나님의 기적을 간구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진리를 중요한 것 으로 생각하는가?
그대는 예수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진리와 계명을 사랑하고 순종하는가? 그대 자신의 신앙적인 경험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그대는 자신의 경험을 부인할만큼 성경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가?
아마도 방언보다 더 교회 안에서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영적 선물이 교회에게 주어진 것은 다른 이유들도 있지만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에베소서 4:13)게 하기 위함임을 생각할 때, 오늘날의“방언”은 참으로 문제의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믿음을 과소 평가하고 있으며, 이와 반면에 방언을 하지 않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방언하는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정죄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정당한 방언의 은사를 부정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새 방언”이“믿는 자들”을 “따르”는 표적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으며, 이 은사는 오순절에 초대 교회에 주어졌던 유일하고도 가장 효과적인 선물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이 평생을 애써도 다 할 수 없는 일을 한 순간에 그들을 위해서 행하셨습니다. 그날부터 그들은 각 지역에 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그들이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들의 언어를 쉽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적적 선물은 그들이 하늘의 부름을 받은 자들이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강력한 증거였습니다.
성경의 어느 곳에도 방언의 선물이 마지막 시대에는 무가치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고린도전서1:7)려야 합니다. 모든 영적 은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에베소서4:13) 자라나도록 교회 안에서 역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은사를 분석하고 또 사용할 때, 잊어서는 안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사단이 진리에 굳게 닻을 내리지 않은 사람들을 혼동시키기 위하여 성령의 역사를 위조하고자 할 것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단의 활동은“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데살로니가후서 2:9)으로 특징지어질 것입니다. 그때에는“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으로서“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자칭 하는 자들”이 있게 될 것인데,“사단도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고린도후서 11:13,14)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술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단이 주는“영적 선물”은 진짜 영적 선물과 너무 흡사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여러 번 반복하여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마태복음24:4)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24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택하신 자들은 보통 사람들이나 적당하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성적이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사단의 기만책의 첫 표적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직 사단만이 직접 위장을 하고 나타나서“큰 표적과 기사를”행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초자연적 역사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워지는 (그러나 사실은 거짓 사도인) 사람들에 의해 행해질 것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2,23.
이 성경절의 앞 뒤 구절들에서 우리는, 이 불행한 영혼들이 주의 뜻을 행치 않았던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많은 권능을 행”했던 기적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기적의 행위들이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거짓된 확신을 줄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이(예수께서 많다고 하셨음) 잘못 인도되어 마침내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사단의 대리자 역할을 하게 될까요?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영혼을 깊이 살피게 하는 두려운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진리와 경험을 비교해 보아야 하며, 이 둘의 관계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진리와 경험의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에게 기만과 미혹의 문을 활짝 열어 놓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한복음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진리는 그리스도인을 항상 온전한 경험으로 인도하는데, 그러한 경험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닙니다. 이 둘 즉, 하나님의 진리와 사람들의 신앙 경험이 올바른 궤도에서 벗어나게 되면, 이 둘은 상호 파괴적인 결과들을 가져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언제나 진리 자체는 불변하지만, 진리를 이해하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잘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지식과 경험을 근거로해서 진리를 변조하려고 하게 됩니다. 진리는 불변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모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경험의 판단 기준이 됩니다. 오직 진리만이 경험을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진리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서 우리의 경험과 지식을 판단해야만 합니다.
인간의 경험은 아무 것도 정의하지 못합니다. 사단은 경험만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지만, 그러나 경험은 올바른 지식의 테두리 안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사건을 관찰하게 되면 각기 매우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경험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더구나 주어진 어떤 경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매우 불완전하며, 설사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선입관, 개성, 편견 등에 의해서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경험이나 입장이나 생각을 중요시 하지 말아야 하며, 오직 성경에 기록된 진리만을 최고의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성령 은사 운동이 비평 받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진리로 경험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근거로 진리를 논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과 과정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나는 어떤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
나는 나의 경험과 매우 흡사한 경험을 신약의 기록에서 발견하였다.
그러므로 나의 경험은 진리이다.
이것은 매우 그럴듯한 논리의 전개처럼 보이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무도 경험만 가지고는 그 경험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경험이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경험과 흡사하다고 해서, 자신들의 경험이 진짜라고 보증할 수 없습니다. 사단은 성령의 역사도 위조할 수 있으며 인간의 감정을 조종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기 때문에,“경험”이 전부인 사람들에게는“진리”가 결국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바울은“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한”사람들에 대하여“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데살로니가후서2:10,11)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성령 은사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깃발 아래 모인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태복음22:14)고 말씀하셨으며, 바울도“허다한 사람”들이“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고린도후서2:17)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성령 은사를 추구하는 모든 교회들을 일괄적으로 다 피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천만에요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교회, 모든 종교적 체험, 모든 영적 현시들을 시험해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데살로니가전서5:21)하기 위해서, 우리는 영적 은사를 강조하고 있는 교회들과 그 교회들의 가르침을 성경의 모든 진리와 비교하여 살펴본 후, 만일 그것들이 성경과 일치하면 확실한 안전감을 가지고 받아들이고, 기만 당할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그룹이 영적 현시와 감정적 체험에 빠져 있는데, 그들이 자신들이 경험한“영”에 의해서 성경의 진리를 척량하려 한다면 그들을 조심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요한복음14:16,17, 15:26, 16:13).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디모데후서 3:16)입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영을 판단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이사야 8:20). 요한도 또 하나의 시험기준을 첨가하였는데, 그가 제시한 시험 기준은 영이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을 시인하는 지를 시험하라는 것입니다(요한일서4:1-3). 이사야에 나왔던 동일한 시험기준이 요한계시록에도 다음과 같이 나와 있음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요한계시록12:17, 14:12).
한가지 이상한 것은 성령 은사를 추구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이 십자가에서 폐지되었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사랑이 하나님의 계명의 준수를 대신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랑과 순종을 분리할 수 없는 상태로 결합시키는 것을 조건으로 성령의 약속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요한복음 14:15-17.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을 잘 이해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성령은“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말했습니다(사도행전 5:32). 예수께 가장 사랑 받았던 제자 요한은 기록하기를,“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요한일서 2:4)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계명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주신 십계명이 아니라“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고 주신 예수님의 새 계명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십계명을 폐지하고 새로운 계명을 세우신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항상 있어온 십계명의 중심 사상을 재 강조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새 계명”은 절대로 십계명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며, 십계명을 비춰주는 빛으로서 주어진 것입니다(요한일서 2:3-8). 더구나 야고보는 십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면 모든 율법을 범하는 것이 된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야고보서 2:10,11). 이것은 십자가 이후, 오순절이 훨씬 지난 후에도 여전히 율법이 유효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고자 하실까요?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개인의 증거에 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1:8)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법인 계명을 불순종하는 죗된 생애를 살고 있는 죄인들에게 권능을 부여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을 시험하는 것으로서“하나님의 말씀인 계명”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기적을 흉내 낼 수 있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하게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이나 진리를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면서 그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단의 역사이지 그리스도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바입니다. 세상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고 성령의 능력을 행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높이고 죄에 대한 회개를 요구하는 성경 말씀들을 공공연히 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잠언 28:9)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율법을 무시하고 불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들에게 역사하실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스스로 자신을 속이지 맙시다!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충성과 순종의 열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얼마나 더 분명히 말씀하셔야 합니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 그분의 말씀은 솔로몬을 통해 주신 성령의 권면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 (잠언 13:13). 순종의 역사를 낳는 것은 우리가 아니요, 우리 속에 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골로새서 1:27~29). 우리의 생애 속에서 성령의 능력을 받기 원한다면, 우리 자신의 마음과 생활이 먼저 그리스도의 진리와 말씀에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분의 완전하신 성품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반사하는 것보다 더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없습니다. 진리의 영께서 말씀하십니다. “(새)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히브리서 8:10).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마음 속에서 이루어질 때, 우리는 은사처럼 보이는 무엇을 산출하고자 애쓰는 일은 더 이상 없게 될 것이며, 우리를 보는 이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거짓 은사를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누구나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잠언25:14, 영어 성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여러 가지 자원과 재능들을 겸손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사용해야 하며, 가장 좋은 은사는 그것이 필요 될 때에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힘차게 살아가는 것이 성경이 권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침례를 간구하며, 우리의 생활 속에서 그분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해의 편협함으로 인하여 그분의 역사를 제한시켜서는 안됩니다. 성령의 참 은사를 행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전혀 계획하거나 의식하지 않은 채 행하고 있습니다. 어떤 은사들은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서 문제들을 해결하고 있으며, 또한 복음의 전파를 위하여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서 초자연적 도움이 필요 되는 상황에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물론 성령의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사단이 하는 것처럼 어떠한 복음적 필요나 목적도 없이 아무 곳에서 일어나거나 어떤 유행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하늘의 능력에 의하여 일어난 기적은, 그것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게 되며, 모든 진리의 말씀에 일치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성령의 열매가 맺혀져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사랑, 깊고 신령한 자아 희생적 사랑이 나타날 것입니다. 사실 성령의 모든 은사는 교회 안에 참 열매가 존재할 때에 있게 됩니다.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친절, 선, 믿음, 온유, 절제 등은“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남은 백성의 특성이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17). 우리는 잘못된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들의 진지함을 인정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떠난 이러한 형태의 예배는 결국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해야 합니다. 사단에 의한 거짓 은사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면 누가 그것을 식별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트로이의 주민들은 그 도시의 성문에 놓여진 평화의 선물을 매우 기뻐했습니다. 주민들이 그 거대한 목마를, 성벽 안으로 들여가자, 곧 그리스 군인들이 그 목마 속에서 쏟아져 나와서 그 도시를 강제로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트로이 사람들은 전에도 여러번 선물을 받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겉 모습만 보고 이 멋진 새 선물을 큰 축복으로 여기며 받았습니다. 불행히도 그들은 적의 계략을 과소평가 함으로써 결국 그 선물 때문에 멸망당했습니다. 트로이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충분한 경고를 가지고 있습니다.“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요한계시록 16:13,14.
개구리 같은 영들이 입에서 나온다는 말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언어의 혼잡으로 인해서 바벨탑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 언어의 혼잡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을 높이기 위한 반역 때문에 생기게 된 것입니다(창세기11:4-9). 그들의 반역은, 방언이라는 혼잡한 언어와 함께 거짓 교리를 마구 퍼뜨림으로써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고의 음성은 오늘날에도 존재합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요한계시록 18:2,4).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음성에 주의를 기울일까요? 과연 그들이 이 경고를 받아들일까요?
성령 은사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 친구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오늘날 성령 은사를 추구하는 대부분의 교회들은, 무아경 속에서 하는 알 수 없는 방언을 초대 교회가 받았던 성령의 참 은사라고 가르치며, 오늘날의 교회에 그 은사가 있는 것은 정당하다는 증거로서 고린도전서 14장을 이용합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한 논쟁이 수년동안 교회들 사이에서 존재해 왔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구체적으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우리가 세세히 다 알 수는 없지만, 대체적인 문제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갓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연륜에 비해서 엄청난 영적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대항하여 싸우기엔 너무도 약한, 겨우 10여명의 남녀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널리 확산시키기 위해 필요되는 강력한 의사소통의 무기를 그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새로 얻은 언어의 능력을 최대한 이용해 보고 싶은 열정에서, 그 미숙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당시 신비 종교에 빠져있는 주변의 이교도들에게 어떤 전시 효과를 나타냄으로써 감명을 주고자 노력했습니다.
오늘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을 말하는 방법, 즉 한번에 하나의 의미 없는 음절을 말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배우는 사람이 마침내 자유롭게 자음 모음을 붙여가며 말을 하기 시작하면 그는“은사”를 받은 것으로 인정됩니다. 이러한 초보자들은 거의 모든 은사 중심의 집회들에 참석할 때마다 만족한 편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예배 분위기에 따라 감정이 고조되어서 그 절정에 달하면 자동적으로 사람들은 방언으로 응하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나 현대 교회들의 상황을 비교해 보면, 영적 선물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잘못 이해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마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사단에게 잃어버린바 되었다고 선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참을성 있고 친절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그들을 지도하고, 그들과 함께 수고한 결과, 그들은 마침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미숙한 그리스도인을 사랑으로 양육하며 성경의 진리로 양육하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입니다. 현대의 방언을 모두 사단의 소행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리스도인 복음 활동에 역효과를 가져옵니다. 비록 사단이, 오늘날 종종 방언이라고 불리워지는 말들을 마음대로 자극하고 조종할 수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열심으로 당신을 찾는 자들을 아시며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했듯이, 오늘날에도 인내심을 가지고 영혼들을 찾아내어 꾸준히 도와 줄 그런 사도들이 필요합니다. 미숙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와 같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그들을 잘 돌보아 줄 책임을 지우십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 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마가복음 9:42).
여러분 자신의 생활을 살펴 보십시오.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증거 활동은 성령의 능력으로 기름부은 바 되었습니까?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마태복음7:4).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깊이 인식하게 될 때에, 우리는 연약한 자들을 참된 사랑과 깊은 염려로 돌보아 줄 수 있게 됩니다. 성령께서 어떤 영혼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위해서는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그 영혼의 마음이 움직여져야 합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리(영문 번역)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리(영문 번역)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23,24).
당신은 알고 계십니까?
역사를 더듬어 보면, 종교적 예배에 무아경 상태의 언어를 사용했던 것은 그리스도 교회가 설립되기 여러 세기 전에 이교주의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무아경의 상태에서 말하는 것은 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며, 힌두교, 불교, 기타 신비종교 등 각 종교단체의 주요 행사가 되고 있습니다. 의미 없는 음절의 반복적 멜로디는 종종 말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몽환경이나 최면 직전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만들기 때문에 심리적 속임수에 말려들 가능성이 매우 높게 만듭니다.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란에서 보전하느니라”(잠언 21:23)고 말한 현인의 충고가 얼마나 적절한 것입니까?
'지상 강의 > 성경으로 돌아가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9호 참 그리스도인의 길을 찾아가는 방법 (0) | 2011.06.07 |
---|---|
제8호 장례식 날짜를 연기하는 방법 (0) | 2011.06.07 |
제6호 한번 얻은 구원을 잃어 버릴 수 있나요? (0) | 2011.06.07 |
제5호 하나님의 은혜가 계명을 폐하는가? (0) | 2011.06.07 |
제4호-지구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사건 (0) | 2011.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