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College :: 제12호 알곡을 만드는 가르침과 가라지를 만드는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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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하나님의 뜻대로 배우려 함
Jangjaedang

제12호 알곡을 만드는 가르침과 가라지를 만드는 가르침

제1부 : 교회 안에 존재하는 세 가지 구원론

어떤 복음을 선택하셨나요?

교회 안에 두 가지 복음이 존재한다. 하나는 참 복음이요, 다른 하나는 가짜 복음이다. 참 복음은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복음이요,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신 참된 구속의 방법이다. 그러나 가짜 복음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그 내용을 살짝 바꾸어 놓은 위조된 복음을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두 복음이 다 한가지로 성경의 단어들과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는데 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두 가지 사이에서 혼돈을 겪는다. 그러나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자기의 마음에 맞는 복음을 자기의 진정한 동기와 소원을 따라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복음은 알곡을 만들어 내고 가짜 복음은 가라지를 생산해 낸다. 모든 사람은 이 두 가지 복음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믿는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 두 가지 복음이 어떻게 파생되었는지 그 역사적인 측면을 마지막 4장에서 연구하기 이전에, 우리는 먼저 교회 안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다른 구원론에 대하여 살펴 보아야 한다.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내가 어떠한 복음을 믿으며 살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좋은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제1부 :교회 안에 존재하는 세 가지 구원론

우리는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어떤 구원론을 믿으며 살아가는가? 우리가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 지를 불문하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구원론 중에 어느 하나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성경이 말하는 참된 구원론(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2) 율법주의의 구원론,

3) 자유주의의 구원론(신학적인 용어로는 도덕적 패배주의라고 함)

기독교 교회 역사를 뒤 돌아 볼 때, 하나님의 교회를 타락시켜온 두 가지 구원론에 대한 교리가 있는데, 그것은 율법주의와 자유주의(도덕적 패배주의)이다. 율법주의는 구원 문제에 있어서 율법에 대한 순종과 선한 행위를 통하여 스스로 구원의 기초를 놓을 수 있다고 믿는 매우 위험한 교리이고, 이와 반대로 도덕적 패배주의는 율법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폐지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세속적이고 방종한 상태로 이끄는데, 이렇게 믿는 사람은 죗된 세속적인 상태에 있으면서도 자신은 구원 받은 상태에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무서운 교리이다. 사단은 이 두 교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집요하게 공격해 왔다.

사단은 유대교회에 철저한 율법주의를 투입시킴으로써, 메시야를 십자가에 달아 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와 죽으심을 통하여 초대 기독교회가 세워졌고 참된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 시작되었다.

초대 기독교회의 신앙이란, 자신의 씻을 수 없는 죄를 용서 받은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서, 값비싼 향유를 사서,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은 신앙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감사와 사랑 때문에 자신의 생애 전체를 그분의 진리에 바치게 만든 신앙이 초대 기독교회의 신앙이다. 사랑은 그 여인을 진리에 완전히 붙잡힌바 된 의의 종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막 14:9).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대한 참된 가르침의 한 실례인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과 사도들이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교회는 형식과 의무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서서히 율법주의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단은 중세기의 종교 암흑시대에 천주교회를 통하여 각종 예식과 순례 즉, 행함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율법주의를 퍼뜨리는데 성공하였다. 이로 인하여 온 세상은 깊은 영적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것은 오늘날까지 전수되어 기독교회 안에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16세기 초에 종교개혁운동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수립해 놓은 참된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하더니 요한 웨슬리 시대에 와서는 복음과 율법의 올바른 균형과 조화가 회복됨으로써 개신교회의 전성기를 맞이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산업혁명 이후부터 과학과 산업이 발달하고 부에 대한 인간이 욕구가 극에 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러한 세속적 흐름과 경향이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 안에도 스며들어 왔는데, 바로 그 즈음부터 그리스도 교회 안에 하나님의 도덕률인 십계명을 범하는 생애를 살아도 구원 받을 수 있다 는 괴이한 가르침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세속화된 교회는 성장과 번영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게 되었고, 그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교인들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여야만 하였다.

그래서 일부 거듭나지 못한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세상을 향하여 교회의 문을 낮춘다는 그럴듯한 명목 하에 십계명을 폐지시키거나 그 권위를 낮추는 작업에 들어갔는데, 일반적으로 이것을 도덕률(십계명) 폐기론 또는 자유주의(도덕적 패배주의)라고 부른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그러한 노력은 이미 세속과 유행 그리고 돈이 주는 매력에 굴복한 교회들에게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타협의 결과로 인하여, 현대 기독교회 안에는 성경이 인정하는 참된 구원론 뿐만 아니라 율법주의와 자유주의(도덕적 패배주의)가 함께 공존하게 되는 괴이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교회 안에 구원을 약속하는 서로 다른 신앙들이 공존하면서부터, 교인들은 미로 속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는 길 잃은 양들이 되고 말았다. 결국에는 다 마찬가지인데, 구원만 받으면 되지 까다롭게 따져서 무슨 소용입니까? 라고 묻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양들

이 하나님의 교회를 가득 채워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두려움마저 느끼게 된다.

이 책자에서 우리는, 모든 교파와 종파를 초월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구원론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여 그 차이점을 비교할 것이며, 어떤 구원론이 성경이 말하는 참 구원론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 세 가지는 첫 번째로 성경이 말하는 참 구원론(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둘째로 율법주의, 셋째로는 자유주의(도덕적 패배주의)이다.

이 세 가지 구원론은 서로 어떻게 다르며, 율법주의와 자유주의(도덕적 패배주의)는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가? 성서적 구원론(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서 율법주의자와 도덕적 패배주의자는 어떠한 이해와 신앙적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A. 율법 주의자들

성도들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해야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거룩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수 있는 오직 한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거듭남을 통해서 그들 속에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하지만, 그리스도께 자신의 마음과 생애를 전적으로 바치지 않은 상태에서 즉, 더럽고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고자 무모한 노력을 한다. 그들은 세상과 재물에 대한 결정적인 포기와 새롭게 거듭나는 마음의 영적 경험 없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서 지킴으로써 의로운 생애를 살고, 그것에 대한 대가로 구원을 얻어내려고 애쓴다. 율법주의자의 문제는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대신에 자신의 의지와 힘을 의지하는 것이다. 연약한 인간의 힘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달리는 고달픈 마라톤 선수처럼, 결국 율법주의자들은 실패와 좌절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게 되는데, 이것이 율법주의자들의 말로이다.

한가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자신이 행한 선한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함으로써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매일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으며, 그분의 은혜를 절실히 필요로 하지 않고, 양심 속에서 속삭이시는 성령의 세미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살아간다면, 이런 그리스도인들 역시 실제에 있어서는 자신을 의지하면서 사는 율법주의적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율법주의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생활에 있어서는 율법주의적 경험 속에서 방황하고 있을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과 심판에 압도되어 두려움 속에서 성경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쓰지만, 자아와 욕심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실패와 좌절의 경험을 반복하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속히 그들의 시선을 십자가로 고정시키고, 자신과 같은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속죄의 은혜를 명상함으로써, 죄와 이기심과 세속적 정신을 버려야만 한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교만과 위선을 버려야 한다. 심령의 비참함을 절실히 느끼는 사람, 다시 말해서 자신에게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선물을 받을 수 있으며, 율법주의의 함정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말로서 십계명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을 무시해 버린다. 십자가에서 십계명이 폐하여졌다. 하나님의 은혜는 율법에 대한 의무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며, 오직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 또한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법은 지킬 필요가 없으며, 지킬 수도 없다 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인가?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은 율법의 유효성에 대해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이루리라 마태복음 5:17. 순종의 대가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새겨진 사랑은 하나님의 진리에 온 마음을 다하여 순종하도록 반응한다는 사실을 자유주의자들(도덕적 패배주의자들)은 이해해야만 한다.

B.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에 대한 감사의 정신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한다고 말한다.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의 구원의 기초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고자 법을 지키려고 한다. 행함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율법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행함은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종교적 의무가 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8~10.

율법주의자들은 순종하고자 하는 그들의 동기와 목적에도 문제가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동과,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놀라운 선물로서 주어지는 구원에 대해서 깊은 감사의 정신이 원동력이 되어서 율법을 지키기 보다는, 지옥불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도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이기적 목적이 동기가 되어서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고자 노력한다. 율법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사실은 자신의 생애를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굴복하지 않은 채 율법에 순종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고린도 후서 5:14.

자유주의자들은 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노력 자체가 율법주의라고 착각한다. 율법주의자들의 문제점은 법을 존중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노력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법에 순종함으로써 구원의 기초를 놓으려고 하는데 있다는 점을 주목하라.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열정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죄의 유혹과 투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좁은 문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누가복음 13:24.

C.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서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들을 사랑한다.

예수께서는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서 잡혀온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나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11. 그 분께서는 죄와 죄인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다루셨다. 죄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지만, 그분께서 가지고 계신 죄인에 대한 동정은 언제나 죄인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던져 주었다. 예수께서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유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죄와 죄인을 함께 미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육체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엄하게 심판한다. 비록 자신들이 극복하지 못하는 죄를 다른 사람들이 범하였을 때일지라도 그것을 확대하고 정죄하는 성향을 종종 드러낸다.

자유주의자들은 죄와 죄인에 대해서 동일한 관대함을 나타낸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죄를 의도적으로 회개하지 않는 죄인에 대해서도 관대한 사랑(?) 을 나타낸다. 자신의 죄를 교회 앞에서 고백해야 할 죄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면서 다음과 같은 사랑가를 부른다.

당신의 죄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무책임한 사랑의 표현은 죄인들의 마음에 위험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 죄인을 사랑하기 위해서 죄에 대한 경계와 경각심을 느슨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자유주의자들의 특징이다.

예수께서는 죄인을 용서해 주시면서 동시에 가서 다시는 죄를 범죄치 말라 는 말씀으로 그의 생애를 지도해 주셨다. 자유주의자들은 죄인의 생애를 관대하게 봐주는 반면에, 하나님의 진리에 굳게 서서 생애 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율법주의자로 정죄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D. 하나님의 성도들은 날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승리의 생애를 살지만 스스로 의롭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기 1:8. 그러나 욥은 자신이 스스로 완전하다고 말하는 위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가 입으로 나를 정죄하리니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하게 여기는도다 욥기 9:20,21. 이러한 태도야말로 하나님의 성도들이 마땅히 가져야 되는 겸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도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눈을 그리스도로부터 돌려서 세상과 자신을 볼 경우에는 여지없이 쓰러지게 된다. 그러한 경우에도 성도들은 요한일서 2:1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대언해줄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기록은 율법주의자들의 경험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너무나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 악은 행하는도다 로마서 7:15,19.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극심한 좌절 속에서 외치는 율법주의자들의 절규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

불행하게도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의 마음과 생애를 그리스도께 온전히 바침으로써 얻게 되는 마음의 평화와 구원을 이해하지 못한다. 매우 엄격한 생애를 살려고 애씀에도 불구하고 실패를 반복하게 됨으로써, 결국에는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고 좌절하게 된다. 실제로 적지 않은 숫자의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좌절, 비관, 자기 실망 등에 빠져서 생애를 불행하게 보내고 있는데, 이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과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엄청난 정신적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버리든지, 심한 경우에는 자살하는 극한 상황에까지 도달한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율법주의자들은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율법이 십자가에서 폐하여졌다는 도덕률 폐기론(자유주의)을 받아들임으로써, 도덕적 패배주의자(자유주의자들)의 길을 걷기로 신앙을 전향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어떤 면에 있어서 율법주의자들의 경험과 유사하지만, 매우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율법을 신실하게 지키지 못하는 점에 있어서는 자유주의자나 율법주의자가 모두 같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율법이 십자가에 의해서 폐하여졌다는 도덕률 폐기론(자유주의)을 믿고 있거나, 아무리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죄를 승리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율법주의자들처럼 좌절감이나 신경쇠약 증세에 시달리지 않는다. 자신들의 부도덕하고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삶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율법을 무시하는 죗된 삶 속에서도 기만적인 행복과 거짓 안전감을 느끼면서 거의 완전한 자기 기만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의 날, 하나님의 법을 무시한 생애 때문에 자신이 잃어버린바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놀라면서 두려워 떨겠는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혹시, 십계명이 폐하여졌으므로 그것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형제자매들이 있는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는 예수 그리스도의 경고를 부디 소홀히 여기지 말기를 바란다.

E.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들의 마음에 완전한 평화를 소유할 수 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는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시편 119:165

율법주의자들은 아무리 애를 쓸지라도 그들의 영혼 속에 평화를 간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육적인 마음으로는 결코 거룩한 율법에 순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정죄에 빠져 들게 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속죄를 충분하게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용서에 대한 확신도 소유할 수 없으며, 죄악에 강력하게 저항할 수 있는 영적 스테미너도 잃어버리게 된다.

자유주의 자들은 거짓 안전감에 도취되어, 율법과 성경이 제시하는 원칙에 대한 순종하려고 애쓰는 일은 율법주의자들이나 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는 자유주의적 정신이 팽배해 있다. 자유주의가 교회 안에 있는 거듭나지 못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그 결과 각종 유행과 장신구와 짙은 화장, 그리고 각종 세속적 행습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범람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술, 담배, 도박을 즐기는 사람까지도 집사나 장로 안수를 받게 되는 이상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된다는 설교와 십일금과 각종 헌금을 기억하여 철저하게 드려야 한다는 말씀은 점점 더 교회 안에서 듣기 어렵게 되었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가 겪고 있는 이러한 증세들은 바로 자유주의 가 가져온 치명적 병폐라는 사실을 직시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얼마나 있는가? 예수께서 천국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신 다음과 같은 비유의 말씀은 지금도 모든 자유주의자들에게 날카로운 경종을 울려 준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태복음 13:44~46.

보화가 감추인 밭의 값이 얼마였는가? 농부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었다. 우연하게 찾은 좋은 진주의 값은 얼마였는가? 장사꾼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었다. 영생의 대가는 자기의 옛 생애를 완전히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그 길을 걷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 길로 들어서는 문을 좁은 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 가운데 자유주의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조심하라! 마지막 날에 그대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근거로 해서 그대들의 신앙과 생애를 심판 받게 될 것이다.

F.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에게 보내는 호소

복음은 완전한 것이어야 한다. 믿음과 행함 그리고 복음과 율법이 완전하게 성서적 조화를 이루고 있는 복음만이 성도들을 죄로부터 구원할 수 있으며, 죄인의 성품과 생애를 변화시켜서 하늘 도성 안으로 인도할 수 있게 만든다. 교회 안에 존재하는 율법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에게 올바른 복음을 설교함으로써, 그들이 멸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가르쳐 주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율법주의와 자유주의로부터 넉넉히 구원해 내실 수 있는 구세주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소개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마음을 변화시켜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아름다운 생애로 이끌어 주실 수 있는 분임을 가르쳐 주도록 하자.

율법주의자들을 향한 우리의 호소는, 자포자기하여 영생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을 포기하고 인생을 방종과 자기 만족으로 살아가는 자유주의자들의 진영으로 건너가고자 하는 유혹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그대들의 문제로부터 빠져 나오기 위한 최선의 처방은, 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생애를 명상함으로써 그대 자신의 무가치함을 깊이 인식하고, 모든 시험과 기만으로부터 완전한 승리를 주실 수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간구하라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을 향한 우리의 호소는, 율법과 원칙에 철저하지만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생활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위선적인 율법주의자들을 보면서 율법을 경시하게 되는 유혹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혹시, 이 글을 읽은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자신의 생애가 나태하고 방종한 삶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경우, 그대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에 순종하는 순결한 생애를 살고자 결심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때에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단의 덫인 율법주의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자신도 모르게 십계명이 십자가에서 폐지되었다는 거짓 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유주의적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가? 그대들이 일단 율법을 경시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 그대들의 생애는 아무런 원칙과 표준이 없이 표류하게 될 것이다. 그대들의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이 세워 놓은 인생관과 철학에 의해서 형성될 것이다.

이러한 그대들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교회 신앙을 애매모호하게 만들 것이다. 세상과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 사이에는 분명한 선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대가 자유주의를 고집하며 살아가는 한, 그대의 생활은 방종의 길을 걷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영원한 파멸이라는 쓰디쓴 후회의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형제자매들을 위한 최선의 처방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라는 것이다. 과연 그대들이 믿는 것처럼 하나님의 법은 폐지되었으며,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는 생애를 살아도 구원을 보장 받을 수 있는지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게 물어 보라. 또한 날마다 십자가와 그분의 은혜에 대해서 깊이 명상하는 일을 잊지 말라. 만일 그대들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희생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다면, 율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 는 말을 결코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 안에 존재하는 가련한 율법주의자들과, 깊은 기만 속에서 만족한 생활을 살아가는 자유주의자들이 십자가를 통하여 하늘 왕국에 이르는 길을 분명하게 발견하게 되기를 기원한다.

제2부 : 이런 신앙이 진짜 신앙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어떤 사람은 자신의 회개한 과정에 대하여 정확한 시간이나 장소나 그 경로를 정확하게 말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가 회개하지 않은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그가 그리스도께로 나온 단계를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신으로 난 사람은 다 그러하니라. 요 3:8.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나 그 영향은 분명히 볼 수 있고, 감촉할 수도 있는 바람과 같이, 사람의 마음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이 거듭나게 하는 능력은 사람의 마음 안에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하며, 또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 사람을 만들어 낸다. 비록 성령의 역사가 소리가 없고, 감각할 수 없을지라도 그 영향과 결과는 현저하게 드러난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졌다면, 우리의 실제 생활이 그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고,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는 없다. 또한 우리 자신이 행하였던 선한 행위를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의 날마다의 생애는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하고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다른 사람들이 과거의 우리와 현재의 우리 사이에 있는 차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새로 태어나는 변화의 경험은 우리의 품성과 습관과 직장 생활에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품성은 한 순간의 선행이나 일시적인 악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인 말과 행실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이 없이도 어느 정도까지는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자신의 덕망을 넓히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의 생애의 겉 모습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자존심이 우리로 하여금 누추하고 옹졸한 모습을 피하게 만들 수도 있다. 또는 우리의 친구들의 눈에 선한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악을 피할 수도 있다. 이기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도 너그럽고 선하게 행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어느 편에 속해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누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가? 우리의 생각이 누구에게 가 있는가? 우리가 누구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하는가? 우리의 가장 열정적인 애정과 최대의 정력을 누구에게 쏟고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면, 우리의 생각은 그분께 가 있을 것이요, 그분과 그분의 사업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즐거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소유와 몸을 다 그분께 바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성품을 닮을 것이며, 그분의 정신을 나타내고, 그분의 뜻을 행하여 범사에 그를 기쁘시게 하기를 소원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사람에게는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가 맺힐 것이다(갈라디아서 5:22).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행하던 것처럼 정욕을 따라서 행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될 것이며, 그분의 품성을 반사하며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전에 미워하던 것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전에 사랑하던 것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 교만하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던 자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될 것이다. 허영심이 많고 거만하던 자가 침착하여지고, 근신하게 될 것이다. 술을 마시던 자가 절제하고, 방탕하던 자가 순결한 사람이 될 것이다. 세상의 허영적인 습관과 유행을 버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외모와 의복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자 하지 않을 것이며,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게 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마음을 단장할 것이다(벧전 3:4).

참된 회개는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켜 준다. 우리는 도적질한 것들을 되돌려 줄 것이며,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어 졌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가서 그분의 용서와 은혜를 받아들일 때, 우리의 마음에는 사랑이 싹트게 된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모든 의무와 책임이 어렵게 보이지 않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메워주시는 멍에는 쉽고 가볍기 때문이다. 드디어, 의무는 즐거움이 되고, 희생은 기쁨이 된다. 전에는 흑암으로 어두웠던 길이 이제는 의로운 태양에 의해서 환하게 밝아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품성의 아름다운 특징들이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서도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께 가장 큰 즐거움이 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열성이 그리스도의 생애를 이끌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지 않은 자들은 스스로 사랑을 조작하여 만들어 낼 수 없다.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마음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9.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새롭게 된 마음에는 사랑이 모든 행위의 원칙이 된다. 사랑은 품성을 변화시키고, 감정을 지배하며, 정욕을 제어하고, 증오심을 사라지게 하며, 정신을 고상하게 만들어 준다.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자신의 마음에 품으면, 우리의 생애는 즐겁고 유쾌한 것이 될 것이며,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감화를 끼치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매우 조심해야 할 두 가지 위험이 있다. 그 하나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한 방법으로서, 자신의 행위와 힘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지키는 일을 자신의 힘으로 행함으로써, 경건하고 거룩하여지려고 하는 자는 전혀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것이다. 먼저, 성령께서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 자신의 열심으로 행하는 모든 일은 이기적이고 더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마음에 받아들일 때에만,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행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행하는 모든 행위마다 이기심과 불순한 동기로 더럽혀지게 된다.

두 번째는 위에서 말했던 위험과 정반대되는 것으로서, 오늘날 기독교계에 매우 편만한 믿음인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의무에서 벗어난다고 믿는 믿음을 말한다. 즉,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가 되는 것이요, 우리의 행하는 바는 우리 자신의 구원 문제와 전혀 관계가 없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든지 지키지 않든 지를 막론하고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사상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순종 이라는 것은 단지 외모적으로 행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행하는 봉사가 충성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의 품성의 표현이며, 사랑의 대원칙을 실현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늘과 땅에서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가 된다.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져서 하나님의 마음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심령에 심어진다면,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실천되지 않겠는가? 사랑의 원칙이 우리의 마음에 심어져서, 우리가 창조주의 형상대로 새로워지면,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라고 하신 새 언약이 성취될 것이다(히 10:16). 그리하여 율법이 마음에 새겨지면, 그것이 생애 가운데서 실천되고, 또한 생애를 꼴 지워가지 않겠는가?

순종, 즉 사랑으로 하는 봉사와 충성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는 참된 증거이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라는 말씀과,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한다 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요일5:3, 요일 2:4). 믿음은 사람을 순종의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심정으로 순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순종의 대가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구원은 믿음을 통하여 받게 되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종은 믿음의 열매이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일 3:5~6. 이것이 참된 증거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면, 우리의 감정과 사상과 목적과 행동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표현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된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요한일서 3:7. 의(righteousness)는 십계명에 표현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표준에 따라 판정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하는 그러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고 참람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엡 2:8. 그러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17. 우리는 이 두 성경절에서 은혜, 믿음, 행함, 그리고 구원에 관한 균형있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오래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라고 하였다(시편 40:8). 그리고 그분께서 지상 생애를 마치시고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한다 라고 하셨다(요한복음 15:10). 또한 성경은 믿음과 행함에 대한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르라고 다음과 같이 촉구하고 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한일서 2:3~6.

제3부 : 구원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

성경에 기록된 원칙들과 그것을 범하는 범죄자에게 가해지게 될 형벌에 대하여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제재들과 위협적인 형벌이 우리의 순종을 더욱 힘든 것으로 만들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가상 인터뷰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의사가 환자에게 검진 결과를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하자. 선생님, 저는 아주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진단 결과 선생님은 제가 시키는 대로 정확히 따르지 않을 경우 죽게 될 것입니다. 선생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제가 지금 말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야 하며, 남은 생애 동안 매일같이 제가 드리는 처방과 지시대로 살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살아있는 한 매일같이 이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생님은 죽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의사가 환자를 위해서 준 처방은 그것을 어길 경우, 무서운 형벌이 따라오는 엄한 규칙들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환자가 그 명령들을 따르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인가? 물론 아니다. 신체의 법칙들은 규칙적으로 식사와 운동을 할 것을 요구한다. 제 시간에 먹고 운동하는 것은 환자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환자는 의사가 자신을 위하여 최선의 처방을 내렸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고 아무런 불평 없이 의사의 지시를 따를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의사에 대한 환자의 신뢰(믿음)이다! 의사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사람은 의사와 그가 내리는 제재에 대하여 불평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신뢰와 사랑의 법칙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성경의 계명이나 형벌에 대하여 전혀 불평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계명과 원칙을 주신 분은 바로 우리의 구원과 영생을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신 분인 예수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최선의 유익을 위하여 계명과 원칙을 준수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행복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킬 것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하는 분께 순종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화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만일 내가 한달 동안의 전도집회 때문에 집을 나서려 하고 있는데, 아내가 심각한 표정을 보이면서, 여보! 당신은 한달 동안 집을 떠나 있을거죠. 당신이 여행하고 있는 동안에는 월급 봉투가 당신에게 우송될지도 모르는데, 떠나시기 전에 이 문서의 내용을 잘 읽어보세요. 이것은 새로 개정된 법규 329조의 내용인데, 만일 가장이 가정에 매달 생활비를 보내주지 않으면, 30일 구류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씌여 있어요. 유치장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월급을 받는 즉시 생활비를 저에게 보내주세요 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아내가 읽어준 법조문 때문에 내가 어떤 위협을 느낄 필요가 있는가? 천만에! 왜냐하면 사랑하는 가족들을 돌보고 싶어하게 만드는 더 높은 사랑의 법이 내 마음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의무를 즐거운 특권으로 바뀌게 해준다. 아내와 교제하던 시절, 나는 사랑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3마일이나 걸어갔던 때를 지금도 기억한다. 지금까지 그 일을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그녀에 대한 사랑이, 힘든 일도 이길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의 마음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아무리 작은 것도 무거운 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은 매우 무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다.

제4부 : 잘못된 복음의 근원과 그 역사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A.D. 4세기경, 기독교계는 종교암흑시대를 돌입하면서 깊은 신학적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마리아가 중보자로 등장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로서의 위치가 흔들렸으며,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의해서 가르쳐지던 원래의 진리가 거의 사라져갔다.


수많은 종류의 교리들이 그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되었다. 교회는 여러 차례의 회의와 결의문을 통해서 정설을 정립하려고 했지만, 그러한 것들은 교회를 점점 더 그리스도의 단순한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이러한 신학적 혼돈 속에서 한 사람이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나타났는데, 그의 이름은 어거스틴이다. 그는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였으며,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오류 중의 상당 부분이 그에 의해서 시작되었거나 수립되었다. 슬픈 사실은, 그의 가르침과 신학적 영향력의 그림자가 오늘날까지 기독교 전체에 드리워져 있어서 수많은 교회들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성장 과정이 미친 영향

어거스틴은 A.D. 354년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기독교인이었고, 부친은 마니교도였다. 마니교는 3세기경에 마니라는 사람에 의해서 창설되었는데, 이 종교는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인 배화교(조로아스터교)의 지류로서, 빛과 어두움(선과 악)의 대립을 강조하였다. 즉, 선과 악이 인간의 생애를 함께 다스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악을 행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받아들인 사람은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해서 스스로 합리화하고 핑계를 댈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가지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이단적 신앙의 배경을 가진 부모의 영향 아래에서 성장하다가 20세가 될 무렵에 이태리 밀란에서 비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기독교인이 된 이후에도, 자신이 어렸을 때에 받았던 이교도적 개념을 머리 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었으며, 어린 시절에 마음 속에 뿌리를 내렸던 사상이 후에 그의 신학적 사상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인간은 결코 죄를 승리할 수 없다 는 어거스틴의 신학적 견해는 어거스틴 이후 700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오면서 수많은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을 교육시키는 지배적인 사상이 되었다.

중세기의 교회 안에서 형성된 수많은 신학적 오류들은 거의 모두 어거스틴에 의해서 시작되었거나 그를 추종하는 신학자들에 의해서 발전되고 확산되었다. 어거스틴에 의해서 만들어진 잘못된 오류를 받아들인 많은 신학자들은 어거스틴의 세워놓은 오류를 전제로 해서 또 따른 오류를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한가지 오류가 또 다른 오류를 이끌어 들였다. 한가지 오류를 진리로 입증하기 위해서 또 다른 오류를 만들어 내는 잘못을 범했던 것이다.

예정론이 시작된 배경

이교의 사상에 물들은 어거스틴은 성경에 나타난 중요한 사상, 즉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의지를 자유롭게 사용해서 선과 악 중에 어떤 하나를 택할 수 있다는 사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가졌던 이교의 영향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절대적이고 독재적인 신으로만 이해했던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어려운 사상이었다. 그는 성경에서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장면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학적 개념에 끼워 맞추기 시작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예정론의 시작이 되었다.

태초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어떤 사람은 멸망 당하도록 예정해 놓으셨다는 이론인 예정론은 어거스틴의 생존하고 있을 당시에도 많은 도전을 받았는데, 어거스틴은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서 누가 구원을 얻던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며, 연약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에 대해서 질문할 자격조차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구원을 지정해 놓으셨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저주 가운데 있도록 지정해 두셨다는 예정론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예정론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오류

어거스틴이 세운 잘못된 견해는 예정론을 만들어 내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예정론의 오류는 논리적으로 또 다른 오류를 만들어 내었다. 즉, 예정론은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게 된다는 개념(once saved, always saved)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예정론은 절대적인 군주인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구원할 것인가를 독단적으로 결정하신다. 그러므로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결코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는다 라는 논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오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거짓 안전 감에 도취되게 된다. 현재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비도덕적인 죄된 생활을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깊은 자기 기만 속에 빠지게 만든다.

예정론은 복음을 전파하는 면에 있어서도,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만일 모든 사람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결정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었다면, 복음을 전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전도를 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예정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대답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라는 궁색한 설명을 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고 선언하고 있다(디모데 전서 2:4).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인 우리의 죄된 선택과 이기적인 결정으로 인하여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오류는 죄된 생활을 살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론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한가지 오류에 대한 믿음이 또 다른 오류를 받아들이도록 만든 것이다. 이러한 오류를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구원과 죄에 대한 승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가 되며,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더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비록 그리스도인이 거듭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있다고 할지라도 결코 죄를 이길 수는 없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들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이단적 견해에 근거를 둔 어거스틴의 주장으로부터 나온 망상에 불과하다.

자신의 죄된 경험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수립된 신학

어거스틴은 성(sex)을 원죄라고 주장하였는데, 그의 그러한 주장은 자신의 죄된 생활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사생아를 낳음으로써 불법적인 아버지가 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사생활이 경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어거스틴의 생활 속에 있는 이러한 약점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죄된 생활을 합리화 시킬 수 있는 신학적 핑계를 찾도록 유도하였다. 자신의 생애에서 죄에 대한 승리의 삶을 살지 못했던 어거스틴은 원죄의 폭을 점차적으로 넓혀서 다른 문제에까지 적용하기에 이르렀다. 즉, 태어나기를 악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죄된 생활을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그의 신학을 지배하게 되었다. 어떤 목사나 신학자도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 이상의 설교와 신학적 이론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어거스틴의 생애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육과 영 사이에 무서운 투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는 영이 육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을 때에 생기는 마음의 놀라운 변화 즉, 거듭남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마음이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죄에 대한 승리는 너무나 자연스런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죄에 대한 승리의 경험을 하지 못했던 어거스틴, 참된 거듭남의 경험을 소유하지 못했던 어거스틴은 자신의 죄된 경험에 맞추어서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유전적으로 물려받는 타락하고 이기적인 본성 자체를 죄로 생각하였던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죄는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죄란 우리가 태어날 때에 이어받는 타락한 본성 자체를 죄라고 정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죄란 우리가 태어나는 죄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마음과 행위로 범하는 불순종을 말하며, 성령께서 양심 속에서 들려주시는 조용한 음성을 거절하면서 선택하는 부도덕한 결정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온전히 마음을 바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으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승리하고 정복하는 순종의 생애를 살 수 있다.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의로운 선택과 의로운 결정을 통해서 말이다.

첫번째 딜레마

그러나 죄에 대한 승리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어거스틴은 육체를 취하시고 이 땅에 태어나셔서 승리의 생애를 사셨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신과 동일한 육체를 취하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의 생애를 사셨는데, 어거스틴의 생애에는 승리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계 3:21. 그리하여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께서는 인간과 전혀 다른 몸을 가지고 태어나셨다는 억지 논리를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신 성육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요. 히 4:15(킹제임스 성경 역).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는 자가 되는 것 같이 그 역시 같은 모양으로 동일한 것을 함께 나누는 자가 되심은... 주께서 진실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음이라. 그러므로 그가 모든 일에 마땅히 자기 형제들과 같이 되셔야 했으니 히 2:14~18(킹제임스 영어 성경역). 그리스도께서는 천사의 육체를 취하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혈과 육을 유전적으로 받고 태어나셨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타락한 육체를 취하고 태어나셨다는 성육신에 대한 가르침을 뒤집어 엎음으로써, 천주교회를 깊은 암흑 가운데로 이끌어간 무염시태설의 기초를 놓았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몸은 우리 인간들의 육체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어머니의 몸 역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전혀 없는 완전무결한 상태로 바꾸어야만 하였다.

그러한 가르침에 기초하여 교회는 점차적으로 무염시태 즉, 성령께서 마리아의 육체를 완전하게 변화시킨 상태에서 아기 예수를 잉태하였다는 주장을 교리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리아의 육체가 흠이 없는 완전무결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육체도 인간적인 연약함이 전혀 없는 완전 무결한 상태에서 태어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를 전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진리를, 영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라 요일 4:2. 성경에서 육체라는 말은 항상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도덕적으로 연약한 본성을 가진 몸을 의미한다.

두번째 딜레마

어거스틴이 예수는 인간과는 다른 완전한 육신을 가지고 오셨다는 기상천외한 이론을 세워 놓았지만, 그는 또 하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어거스틴의 이론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는 인류로부터 멀어져 버렸다. 그리스도의 육체를 인간의 육체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놓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당하는 시험과 유혹을 당한 일이 없는 분이 되셨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시험 받고 유혹 받는 생애와는 전혀 다른 생애를 사셨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결론은 인간은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또 하나의 치명적인 결론으로 이끌어 간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 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다 히 4:15. 어거스틴이 만들어낸 이러한 이론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면에 있어서 더 이상 인간의 모본이 될 수 없으셨으며, 그 결과 인류를 위한 중보자로서의 자리를 빼앗기게 되셨다. 그리하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중보자를 만들어 내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는 신학적으로 완전한 논리를 정립하기 위해서, 다른 인간들처럼 유혹을 느낄 뿐만 아니라, 유혹에 굴복하여 죄를 짓기도 하는 중보자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성경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라고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인류를 위한 새로운 중보자로 교인들에게 소개하기에 이르렀다(디모데 전서 2:5). 나중에는 이것이 더욱 발전되어 나가서, 수많은 성인(saints)들을 제정하게 되었으며, 사제들과 신부들에게 중보자의 역할을 맡김으로써 신자들로부터 죄의 고백을 받아서 하나님께 중보하게 만들었다. 교회는 어거스틴의 잘못된 사상과 신학에 기초를 둔 교리의 헛점을 메우기 위해서 한번에 한 계단씩 오류에 오류를 더해갈 수밖에 없었다. 원죄가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교회의 신조 때문에 임신이 되는 순간 태아는 영원한 멸망의 정죄를 받게 되었다.

오류에서 오류로!

그런데 이러한 논리는 또 하나의 질문에 부딪히게 되는데, 그것은 어떻게 하면 원죄에 대한 죄책감을 벗어날 수 있는가? 라는 교인들의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된 것이 세례(영세)라고 불리는 의식에 의해서 원죄의 정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라는 것이었다. 교회 지도자들의 답변에 뒤이어 또 하나의 질문이 들어 왔는데, 그것은 세례(영세)받지 않은 자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이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참으로 끔직한 것이었는데, 세례(영세)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저주를 받아서 영원히 타는 지옥 불에 떨어진다 라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라. 세례(영세)를 미처 받기 전에 죽은 어린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 있어서 교회의 그러한 답변은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중세기는 어린 아기의 사망률이 매우 높던 때였다. 자신들의 아기가 영원한 지옥 불에서 끝없이 고통 당하고 있을 것을 상상하는 진실하지만 무지한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고뇌는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즉각적으로 교인들의 고뇌를 해소시킬 수 있는 설득력 있는 해결책을 강구해야만 하였다. 그래서 연옥 과 림보 라는 기상천외한 것들이 발명되게 이르렀다. 연옥은 하늘도 아니며 지옥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과 지옥의 중간에 해당하는 곳이며, 림보는 천당은 아니지만 연옥이나 지옥처럼 불타는 고통은 없는 곳이다. 교회는 이러한 연옥과 림보를 교인들에게 소개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달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제시하는 그러한 해결책으로도 아기를 잃어버린 부모의 아픈 심정을 완전히 달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드디어 유아 세례 라는 의식을 만들어 내기로 결정하였다. 출산의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산모의 배 위에 신부가 물을 뿌리면서 이제 유아와 산모가 모두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선언하는 유아 세례야말로 교인들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한 신학자의 잘못된 사상이 오류에서 오류로 발전되게 되었는데, 결국에는 그러한 오류들이 교회의 정식 교리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아퀴나스와 바벌라드 같은 신학자에 의해서 어거스틴의 이론이 잠시 주춤거리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16세기 초에 위대한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나고 개혁자들이 교회의 부패와 오류에 대해서 대항하였지만, 천 년에 걸쳐서 뿌리 깊이 박혀있던 오류의 근원을 송두리째 뽑아내는 일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구교를 대항하여 개신교 운동이 전개되었지만, 어거스틴의 이론은 개신교회 중심부까지 들어와서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

루터가 죽고 나서 그의 동료 개혁자인 멜랑톤이 루터 교회를 예정론에서 끌어냈지만, 장로교회를 수립한 요한 칼뱅이나 요한 낙스는 예정론을 받아 들였다. 그 후에 감리 교회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에 의해서 예정론이 거절되고,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는 가르침이 오류로서 지적되었지만, 여전히 현대 기독교 안에 이러한 가르침들이 넘실거리고 있다.

이기적이고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본성은 이러한 오류들을 선호할 뿐만 아니라, 성경의 분명한 진리를 거절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어거스틴과 그의 후예들이 수립한 거짓 교리들이 소위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교파에서도 공식적인 가르침으로 채택되고 있는 실정에 있다. 오늘날 교파가 갖는 의미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자신이 어떤 교파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 보다는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진리를 올바로 믿고 있는지를 확인하면서 살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예정론과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는 가르침, 그리고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졌으므로 십계명은 더이상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도덕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도덕률 폐기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가르침이야말로 교회를 세속적이고 무능력하게 만들어 가는 장본인이다.

누가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가? 마지막 시대에는 진리 위에 굳건히 서있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 구원에 관한 진리는 이렇게 믿어도 되고 저렇게 믿어도 되는 가르침이 아니다.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는 오직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너희가 믿음 위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린도후서 13:3.

결론

참된 복음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매일 예수님을 따르게 하는 복음이다. 이 복음은 예수를 사랑하는 깊은 마음에서 그리스도인 삶을 살게 만들기 때문에 죄의 세력 그 자체에서 구원 받게 만드는 성경의 복음이다. 가짜 복음은 십자가의 교리만 받아들이고 실재적인 죄의 힘에서는 구원받지 못했어도 마치 구원 받은 것처럼 착각하며 살게 만드는 값싼 복음이다. 당신은 어떠한 복음을 믿고 있는가?

posted by Jangjaed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