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College :: '지상 강의/성경으로 돌아가자' 카테고리의 글 목록 (19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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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하나님의 뜻대로 배우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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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강의/성경으로 돌아가자'에 해당되는 글 33건

  1. 2011.06.17 제15호 사단이 만들어 놓은 구원의 위조 지폐

성경으로 돌아가는 길잡이 15호

제1부 : 기독교회에 들어온 구원에 대한 오해

1. 한 가지 조건을 전제로 주어진 특권

만일 성경 전체에 나오는 말씀을 두 단어로 요약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단어를 선택하겠는가? 죄와 구원이라는 단어야말로 성경 전체의 내용을 가장 정확하게 요약하는 단어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순종을 전제 조건으로 놀라운 특권들을 주셨다. 그들이 에덴 동산에서 순종의 생애를 사는 한, 놀라운 선물들이 그들에게 영원히 약속되어 있었다. 생명, 의로운 성품, 지구의 모든 생물을 지배함, 그리고 에덴 동산의 아름다운 집 등이 모두 그들의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 가지의 조건 하에서 이 모든 축복들을 허락하셨는데, 그것은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단은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서 먹는 불순종, 즉 죄를 범하게 함으로써 영생과 구원을 빼앗아 갔다. 사단이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범죄 하도록 유혹한 사건은 인류의 운명에 있어서 매우 치명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인류의 시조가 죄를 범한 이후부터 그리스도와 사단, 진리와 오류, 순종과 불순종 사이의 대쟁투가 시작되었다. 성경의 모든 장마다 인류를 원래의 위치로 회복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담겨져 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 1:21. 물론, 여기서 죄는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것을 말한다.

2. 구원의 조건

가끔씩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왜 율법에 대한 행함과 외부로 나타나는 행위에 대해서 염려해야 하나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중심과 동기를 더욱 중요하게 보십니다! 옳은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의 내적인 마음과 외적으로 나타나는 행위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태초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충성을 시험하기 위한 목적으로 순종 이라는 방편을 사용하셨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외부적 행위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으셨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행위는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5.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순종의 삶을 살게 되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순종의 삶을 살지 못한다.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은, 십자가의 죽음과 희생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새겨지는 감사와 사랑의 정신을 통하여 그들의 생애 전체가 하나님의 법과 일치되도록 하심으로써 구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믿음을 통하여 어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진리에 일치하는 생애를 살아가게 된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도 순종에 관한 동일한 이슈가 펼쳐져 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 또는 짐승의 표 중에서 어느 하나를 받게 된다. 시험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순종을 전제 조건으로 해서 각 영혼들에게 다가올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해서 볼 때, 마지막 시대에 구원 받는 성도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집약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시조를 에덴 동산에서 살도록 허락하셨던 조건이 인간이 하늘 낙원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구원의 조건은 시대를 통하여 언제나 불변하는 것이었다.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4:12.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 12:17.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요한계시록 22:14 (킹제임스 영어 성경 역).

3. 하늘에서 죄와 반역이 반복되지 않게 되는 이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을 만큼 영적으로 안전한 사람들에게만 영생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에덴 동산에 선악과가 있어서 아담과 하와의 선택 여하에 따라서 불순종을 범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성도들을 하늘에 데려간 후에도, 그들에게 여전히 선택의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물론, 성경은, 하늘에서는 다시는 반역이나 죄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는 6천년 동안 있었던 것과 같은 죄와 반역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선택권이 없기 때문에 죄와 반역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하기 보다는 차리리 죽기를 원하는 거룩한 성도들을 하늘로 데려갈 것이기 때문에 다시는 죄와 반역이 없게 되는 것이다. 천사들은 하늘이 안전할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도들이 불멸의 몸을 받기 이전에 세상에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악몽이 구원 받아서 하늘에 올라간 성도들에 의해서 다시 재현될 위험은 전혀 없다. 성도들은 하늘에서 자신들의 경험을 간증하면서, 죄와 배도의 위험천만함을 온 우주계에 증거 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체험적인 간증이 온 우주를 죄로부터 보호하게 될 것이다.

4. 사단의 기본 전략

사단이 구상하는 기본 전략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더러운 것은 결코 하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죄를 품고 있는 자를 결코 하늘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우리가 누구에게 순종을 하는가가 우리의 주인을 결정한다. 바로 그 자가 우리의 주인이 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 6:16. 우리는 우리가 순종하는 자의 종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그대가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그대는 하나님의 종이다.

그러나 그대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중단하면,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그치는 것이다. 사단의 계획은 그대로 하여금 사단 자신을 순종하도록 함으로써 그대를 사단 자신의 종으로 삼는 것이다.

그대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한, 그대가 무엇을 할지라도 사단은 상관하지 않는다. 그대가 그리스도 교회의 이름으로 무엇을 할지라도, 그대 개인의 마음과 생활에서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있다면, 사단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나간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적 의식과 활동에 생애를 바쳤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불순종 함으로써 사단의 종이 된 예가 너무나 많이 있다.

사실상, 그들도 자신들의 불순종에 대한 이유를 말할 때, 매우 종교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씀을 주었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2~23.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주말마다 빠지지 않고 교회에 다니면서 교회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하지만,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불법한 생애를 살아감으로써 영생을 잃어버리게 되는 비극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주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행하였지만, 하늘에 들어가기 직전인 세상 끝에 예수께로부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 한다는 선언을 듣게 되는 장면을 생각해 보았는가? 왜 이런 비극이 생기게 되었는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도록 만들었는가?

예수께서는 이 성경절의 바로 앞에서 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해 두셨다. 그들이 주의 이름을 매우 많이 불렀지만, 그들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의 이름을 크게 부르면서 열심을 내어 일했지만, 그들의 열심과 행위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5장 9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그분을 열심으로 경배하였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때에 가서야 비로소 자신들이 잃어버림을 당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을 때에 얼마나 심한 충격을 받겠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못 경배하는 것이며, 그들의 경배가 무가치하고 헛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께서 그들의 경배를 받으실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기를,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옆으로 제껴놓고, 인간이 만든 계명과 교리 즉,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 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순종을 가장 높은 경배 형태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5. 불순종에 이유가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에 대한 타당한 이유가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의 귀에 그럴 듯하게 들리는 이유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사울의 경우를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으로 승인하셨다.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아말렉 사람들과의 전쟁을 위하여 보냈을 때, 그가 어떻게 했는지 알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 사람들을 완전히 파멸시키라고 명령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명령이 너무 지나 치다고 생각하였다. 이스라엘 진영으로 어떤 전리품도 가지고 돌아오지 말고 파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졌다. 하나님의 명령은 매우 구체적이고 분명하였다.

그런데 사울은 살찌고 건강한 얼마의 가축을 남겨 두었다. 그가 왜 그렇게 했을까? 전쟁터로부터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선지자 사무엘을 만났을 때, 그가 자신의 불순종을 매우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말을 들어보자. 사무엘이 가로되 그러면 내 귀에 들리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찜이니이까? 사울이 가로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사무엘상 15:14~15.

사울의 그러한 대답이 아무리 논리적으로 들릴지라도, 그들의 마음 속에는 사악하고 위선적인 계획이 도사리고 있었다. 우선, 사울의 대답 속에는 가축들을 모두 죽이지 않고 남겨서 가져온 것에 대한 책임을 백성 들에게 전가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 사울은 불순종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였다. 사울은 왕으로서 책임을 맡은 자였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받은 자였다.

그는 그 이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려고 하였다. 오직 적은 불순종이 있었을 뿐인데, 그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이란 말인가? 더구나 그들이 남겨 가지고 온 가축들은 그들 자신의 부의 축적을 위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질 좋은 가축들을 골라서 가지고 온 것이 아닌가?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이 문제의 핵심을 잘 이해해야 한다. 사울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울의 그러한 논리를 받아주실 수 있겠는가? 사무엘 선지자의 칼날같이 예리한 말을 들어보라.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사무엘상 15:22.

사울의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다시 한번 교훈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가장 높은 경배의 형태로 간주하신다는 것이다. 비록 사울왕이 불순종에 대하여 매우 종교적이고 설득력 있는 이유를 말하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분명하게 거절하셨으며, 더 이상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취급하지 않으셨다.

6. 사람들이 순종하지 않는 이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대 자신과 주변을 살펴보라.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고 납득할 만한 것들만 골라서 순종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계명과 자신이 받아들이기 힘든 진리는 여러 가지 그럴듯한 구실을 붙여서 거절하거나 무시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사울 왕이 범한 잘못을 뒤쫓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을 깊이 인정해야 한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은 비록 자신이 하나님의 어떤 말씀을 잘 납득할 수 없고 동의할 수 없다고 해서, 그 말씀에 불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은 어린 아이일 지라도 이해할 수 있게 분명한 요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 그러한 계명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었는 지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경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려고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력을 하나님의 지혜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성경이 주의 날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고 있으며, 심지어는 장사를 함으로서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을 범하고 있다.

창조주께서 오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기록한 명령을 감히 거역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며, 헌금을 드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닌가! 물론, 그들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 잘못을 범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영원불변의 법에 불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경고를 다시 한번 들어보라.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목사로서 나는 지난 수 년 동안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십계명을 범하도록 가르치는 설교들을 들어왔다. 그러한 설교자들 중의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이야기 하였으며, 진지한 설교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요즘, 자동차 뒤 범퍼에 붙이는 스티커 중에서 다음과 같은 말들이 유행하고 있다. 당신이 예수님을 사랑하면 웃어보세요! , 그대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손을 흔드세요! 사람들은 사랑이 희생을 요구하지 않을 때에는 사랑을 좋아한다.

그러나 사랑이 희생과 손해를 요구할 때에는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희생과 헌신이 따르는 사랑이다. 그 사랑은 우리를 좁은 길로 인도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 (요 14:15)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사랑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설명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값싼 사랑이 아니다. 그 분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거품과 같이 있다가 사라지는 감정적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제2부 : 구원의 위조 지폐


사단이 만든 두 가지 위조 지폐

사단은 어떻게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죄를 범하도록 유도할까? 그가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지금 가장 뛰어난 위조범을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매우 교활한 기만자인 사단은 종종 선과 악이 혼합된 형태의 수단을 사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고자 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심지어 성경 말씀을 이용하기조차 한다.

물론 사단이 성경을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악용한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으셨을 때에 그러했듯이, 사단 역시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 사단이 그리스도인들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 하도록 이끌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속임수, 즉 율법주의와 값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기독교회 속에 밀어 넣고 있다.

1. 첫 번째 위조 지폐 - 율법주의

사단의 첫번째 위조 지폐는 다음과 같은 성경절을 이용하여 조작되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요한계시록 22:14(영문 킹제임스 성경 번역). 사단은 이 성경절을 언급하면서 인간이 구원 받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계명에 잘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어떤 면에 있어서 이러한 주장은 진리이다.

사실상, 계명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 속에 매우 치명적인 오류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구원을 얻기 위하여 스스로 계명을 지킬 만큼 선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개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율법주의자라고 부르는데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단의 기만적인 함정에 빠져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구원의 계획과는 매우 상반된 것이다. 자신이 한 순종과 희생의 대가로 구원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사상이다. 이러한 율법주의는 모든 이방 종교 가르침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 받기 위한 방법으로 계명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더욱 많은 주의를 기울이게 되지 않습니까? 라고 질문한다. 그럴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에덴 동산에서 인류의 시조가 죄를 범한 이후에 인간의 본성에는 매우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아담은 오늘날의 우리보다 훨씬 순종하기 쉬운 상태의 본성을 가지고 창조되었다. 그는 순결하였으며, 타락하지 않았고,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없는 본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받은 모든 유혹은 밖으로부터 오는 유혹뿐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물려받은 본성은 타락한 본성이며, 우리 안에 가장 큰 유혹의 샘이 있는 본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좀 더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아담과 하와처럼 죄를 피할 수 있다고 수백만의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사단의 기만적 주장을 믿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죄된 성향을 조절하기 위해서 애쓰지만 실패에 실패를 거듭할 뿐이다.

이러한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결국 스스로 좌절하여 다음과 같은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도 열심히 해보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사람이 죄를 승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하라고 결코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은 구원과 전혀 관계가 없음이 틀림없다. 결과적으로, 율법주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을 담대하게 더욱 더 많이 범하는 타락한 생애를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율법주의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보자. 만일 그대가 지금 이 순간부터 남은 일생 동안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킬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즉, 남은 생애 동안에 단 한번의 실수나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한 생애가 그대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이미 지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범한 죄로 인하여 그대에게는 이미 죽음이 선언되어 있다. 어떠한 종류의 선한 행위로도 그대가 과거에 범했던 죄의 기록을 변경시킬 수 없다. 사람을 죽인 사람이 이웃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해서 그의 죄가 사라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지금까지 오직 한 사람만이 단 하나의 죄도 범하지 않은 완전한 생애를 살았는데,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록에는 반복되는 더러움과 추함만이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도 자신이 과거에 행한 기록에 근거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오직 완전한 의만을 인정하시며, 의로운 행위만을 가납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중의 어떤 사람도 그러한 생애의 기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어쨌든지 간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거룩함을 얻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의로움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것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구원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감사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배려가 베풀어져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말씀 가운데 하나가 로마서 5장 10절에서 발견된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여기서 잠깐 멈춰서 이 성경절의 전반부를 검토해보자. 왜냐하면 이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기별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성경절은 말하기를, 우리가 죄를 범하였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해이다.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시키는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죄를 속하는 대속이 완성되어야 한다. 성경 말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이와 같은 화해를 이룩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어떻게 십자가가 원수 관계를 없애고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켰는가?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 무엇을 지시고 가셨는가? 하나님의 법은 죄의 대가로 죽음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의 육체로 아담과 하와의 모든 자손들이 범한 죄의 책임을 지셨던 것이다.

사실상, 예수께서는 우리 각자의 죄에 대한 책임과 그분의 죽음을 교환하셨던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 위에 내려져 있는 정죄와 사형 명령을 취하셔서, 그것을 십자가로 지시고 가신 후, 우리에게 내려져 있던 죄의 값인 형벌을 대신 당하셨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께서는 우리가 과거에 범죄한 죄들에 관한 추한 기록들을 덮어주신다. 또한,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이 완전한 의로운 생애를 사심으로서 우리에게 그분의 의를 전가 시켜 주시는데, 이로서 하나님과의 화목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마련된 구원과 영생을 어떻게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받을 수 있는가? 우리가 그분의 생명을 받기 위해서는 자아가 죽어야 한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과거에 전혀 죄를 범한 적이 없는 것처럼 취급하시며, 예수께서 우리 죄의 책임을 십자가 위에서 담당하신 것으로 취급하신다.

로마서 5장 10절의 후반부를 살펴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을 설명한 후, 바울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생애,life)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여기서 완전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 즉, 둘 모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과거의 죄들은 예수께서 이루신 대속의 죽음에 의해서 덮어짐을 당하게 되며, 미래의 승리는 인간의 육체를 쓰시고 죄 없는 삶을 사신 그분의 생애로부터 나오는 공로와 모본을 보면서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하늘 기록 책에 이미 기록된 행위들을 변경할 수 없다. 그것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종결되는 완전한 순종의 생애를 우리의 것으로 주장함으로써 만 지워질 수 있다. 그리고 장래의 행위들은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육체를 취하시고 사시면서 경험하셨던 승리를 나누어 받음으로써 변화될 수 있다. 이러한 진리를 사단이 공격함으로써, 그는 사람들을 죄짓게 만드는데 놀라운 성공을 거두고 있다.

2. 두 번째 위조 지폐 - 값싼 은혜의 복음

사단은 이 문제에 대해서 매우 교묘한 공격을 감행해 왔다. 놀랄 만큼 설득력 있는 위조물을 만듦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혼돈 가운데로 몰아가고 있다. 사단의 주장은 이렇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 받을 수 없다. 우리는 행함에 의해서 의롭다고 인정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에 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한 불필요한 것이다.


사단의 이러한 논리 중에서 어떤 부분은 진리이다. 그러나 그 속에 무서운 오류와 기만이 숨어 있다는 모습을 직시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행함에 의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는다는 말은 진리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이 우리가 순종의 의무로부터 면제 받았다는 뜻은 아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단의 교묘한 논리에 이끌려서 그의 먹이가 되고 있다. 나는 나의 복음 전도 사업 중에서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수많이 보아왔다. 불신자들 뿐만 아니라, 여러 교파와 교단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전도회를 개최했을 때, 첫 며칠 동안은 하나님의 진리에 열렬하게 동의하다가도, 하나님의 법과 은혜에 관한 문제에 들어가면 즉시로 다음과 같은 반응이 나온다: 목사님, 우리에게 옛날 구약시대에 있었던 법을 강요하지 마십시요. 우리는 행함에 의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은혜 아래에서 살고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시잖아요?

여기서, 우리는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강력한 반응을 나타내는 분들 역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주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율법주의에 대한 그들의 그러한 태도는 그들을 반대편에 도사리고 있는 또 다른 기만인 값싼 은혜 속으로 끌고 들어갔으며, 결국에는 하나님의 법이 폐지되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하였다.

믿음과 행함, 그리고 순종과 은혜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성서적인 균형을 잃어버리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지! 오늘날, 두 가지 극단이 있는데, 사단은 우리 모두를 이 두 가지 극단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 온갖 이론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믿음과 행함에 관한 균형은 믿음과 행함이라는 글자를 양쪽 끝에 새긴 노를 젓는 것과 같다. 만일 두 가지를 균형 있게 움직이지 않는다면, 배는 제자리에서 원을 그리면서 맴돌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신앙 생활이 전진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데, 그 이유는 구원에 관한 두 가지 중요한 면들이 올바르고 균형 있게 활용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과 행함은 서로가 부딪치거나 투쟁하는 것이 아니며, 서로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협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항상 순종이라는 선한 행위를 생산해 낸다.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야고보서 2:26) 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우리 모두의 가장 큰 원수인 사단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을 교활하게 위조해 놓았다. 그는 의로움 위에 율법주의라는 보자기를 뒤집어 씌어 놓았으며, 믿음 은 순종을 생산해 내지 못하는 값싼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짜 의로움 과 진짜 믿음 을 보지 못한 채, 가짜 의와 가짜 믿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수많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더럽고 추한 것으로 둔갑 되어 있으며, 믿음이 값싼 감정에 불과한 것으로 추락되었다.

성경에서, 우리는 세가지 믿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사단이 가지고 있는 믿음인데, 사도 야고보는 그러한 믿음은 행함이 전혀 없는 믿음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야고보서 2:19~20. 야고보가 지적인 동의나 정신적인 동의에 불과한 믿음을 귀신의 믿음으로 묘사하였던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두 번째 종류의 믿음은 행함이 있지만, 잘못된 동기와 목적을 근거로 이루어 지는 것을 말한다. 신호등이 있는 네거리에서 정지 신호를 보고 있는 운전사의 예를 통하여 두 번째 부류의 믿음을 설명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자동차를 정지시켰다. 그가 왜 자동차를 정지시켰는가? 다른 편에서 달려오고 있는 자동차와 충돌하여 죽는 것이 무서워서 정지하였는가? 아니면, 교통 경찰관이 자신에게 법규 위반 티켓을 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정지하였는가? 이러한 종류의 믿음은 하나님께 가납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들은 두려움에 근거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움에 근거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 그들의 신앙은 마치 불을 피해 도망가는 것과 같다. 그들은 자신들이 걷고 있는 길의 끝에 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그 불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선한 사람들이 하는 선한 행위를 하기 위해서 애를 쓴다. 그러나 이러한 부류의 믿음은 율법주의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세 번째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자. 세 번째 믿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일한 믿음인데, 그 믿음은 갈라디아서 5장 6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할례나 무 할례나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하는 모든 순종의 행위가 사랑에 그 근거와 동기를 두고 이루어질 때에 그것은 참된 믿음이 되는 것이다.

제3부 : 죄와 구원


사랑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일한 동기가 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기 앞서, 매우 결정적으로 표현된 몇몇 성경절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사도 요한은 사도 중에서도 사랑의 사도로 불리 울 만큼 사랑스러운 성품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에 소개하는 이 성경절은 매우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2제자 가운데서 가장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도로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랑의 사도인 요한 이야말로 다른 어떤 사도들보다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많이 언급했던 사도이다.

우선, 우리는 죄의 정의에 대해서 기록한 성경절 중에서 가장 분명하고 단순한 성경절을 요한의 기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요한일서 3:4. 부디 이 성경절을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간직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앞으로 계속해서 죄의 본성과 성격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사도 요한이 제시한 죄의 정의를 언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성경절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명백하지만, 여기서 법 이라는 말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요한은 여기서 법 을 무슨 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인가? 사도 바울 역시 로마서 7장 7절에서 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거기서 법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답변을 준비해 두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바울은 질문에 대한 답을 하면서, 직접적으로 십계명의 열째 계명(탐심)을 언급하면서, 죄는 십계명을 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하게 말하였다. 죄는 법을 범하는 것으로서, 특히 십계명을 범하는 것을 말한다.

요한일서 3장을 계속해서 읽어나갈 때, 4절에서 기록된 죄의 정의를 기억하기를 바란다. 즉, 죄의 정의는 도덕률인 십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5절에 전개되는 요한의 기록을 보자.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예수께서 우리로부터 가져가신 것은 무엇인가? 우리 죄이다. 무슨 죄인가? 십계명을 범한 죄이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우리가 십계명을 범하는 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계속해서 요한은 놀라운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6절에 나오는 성경절이야말로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한 말씀이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굉장한 말씀이 아닌가? 나는 지금까지 굉장히 강력한 설교를 많이 들어 왔는데, 어떤 목사나 설교가도 이처럼 강력한 설교를 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이 6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십계명에 대해서 불순종하는 생애를 사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며, 그분께서 베푸신 구원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다 라는 것이다. 충격적인 이야기 아닌가? 정말 그렇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좀더 읽어 보자. 좀더 강력한 기록이 나온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였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심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7~8절. 여기서, 요한은 진리를 입으로 공언하는 자들과 진리를 진짜로 믿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을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사도 요한은 죄와 구원의 문제를 설명하면서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라는 경고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앞에 펼쳐져 있는 놀라운 기만과 속임수에 대한 경고이다. 마태복음 24장 3절에서, 제자들은 예수께 재림에 관한 징조를 질문 하는데, 예수께서는 4절에서 다음과 같은 답변을 주셨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런 다음, 마지막 때에 휴거 에 대한 가르침에 대하여 놀라운 혼돈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시대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가르침도 이와 유사한 혼돈 속에 빠질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할 수 있다. 죄의 문제가 혼돈될 것이다. 순종과 법에 관한 진리가 혼동되고 왜곡될 것이다.

요한은 어떤 사람도 십계명에 의도적으로 불순종하고 있으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칭의)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못박아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러한 사람은 사실에 있어서 마귀에게 속한 자이며, 그리스도인이 전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다음, 요한은 신학자들 뿐 아니라 일반 평신도 사이에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말씀을 기록하였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seed)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요한일서 3장 9절. 성경에서 여자의 자손(the seed of the woman)은 누구를 말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씨(후손)이시며, 하나님의 개심한 참된 자녀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마음에 모시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함께 거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십계명에 대해서 고의적으로 불순종 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예수께서 거하실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는 그리스도께서는 의도적으로 불순종하는 죄인의 마음 속에 그분께서 거하실 수 있는 보좌를 마련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죄의 문제를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하자. 어거스틴과 요한 칼빈의 가르침을 통하여 이상한 가르침이 그리스도 교회로 잠입하여 들어왔다. 그 이상한 가르침은 고의적인 불순종의 생애를 걸어가면서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 무서운 가르침을 경계하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칭의가 우리의 마음 상태를 변화시키는 일없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입장을 변화시킨다는 가르침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 마시고 있다.

칼빈의 사상은 비록 우리가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범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덮어주시는 의인 칭의가 하나님 존전에서 우리를 가납 받을 수 있게 만들어 준다고 믿는 것이다. 또한, 속죄(atonement)는 우리를 죄의 결과인 형벌로부터 구원하는 것이지, 죄 그 자체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한다는 가르침이 칼빈의 사상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는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죄가 어떠한 것이냐 하는 그 죄의 본질을 바꾸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칼빈의 사상이다.

이러한 칼빈의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사람이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어쨌든 간에 죄는 그것이 이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치명적인 것이 되지 않게 된다. 개심하지 않은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면, 영원한 멸망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지만, 구원 받은 후에 범한 동일한 죄는 그 그리스도인을 지옥으로 보낼 수 없게 된다.

죄인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대신에 죄의 성격(본질)을 변화시킨다는 말의 의미를 이제 이해할 수 있는가? 종교는 장난이 아니지 않는가? 칭의는 우리가 계속적으로 범하고 있는 죄를 덮어주는 것이 아니다. 칭의는 새롭고 영적인 삶을 가져다 주는 개심(거듭남)을 통하여 전혀 새로운 마음과 생명을 우리에게 공급해 준다. 칭의는 죄를 고의적으로 범하는 동안에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 칭의는 계속적으로 범해지는 죄를 가리워 주는 망토와 같은 것이 아니다. 칭의는 죄책감과 죄의 권세를 벗기어 주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상태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잘 이해하라! 진짜 믿음은 항상 순종이라는 선한 행위를 생산해 낸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from sins) 구원해 내기 위해서 오신 것이지, 죄 안(in sins)에서 구원을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from their sins)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태복음 1:21.

성경은 죄에 대해서 수없이 많이 말하고 있지만, 단 한번도 죄를 어떤 좋은 것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예를 들면, 성경에는 우리들이 범하는 죄의 양을 줄이라는 식의 표현을 결코 말하고 있지 않다. 성경의 어떤 곳에도 불순종의 횟수를 줄이거나 감소시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죄는 하나님의 안목에서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알고 있는 죄들을 단호하게 버려야 하며, 거절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간음한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서 죄를 범하지 말라 라고 하셨다. 그분께서는 가서 그 죄를 줄여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쓰노니 죄를 점점 더 줄여가라 고 기록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너희에게 쓰노니 너희는 죄를 범하지 말라 고 말하였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죄에 대하여 그의 편지서를 기록할 때에 전혀 망설이지 않은 태도로 분명하게 말하였다. 어떤 목사나 설교가도 그가 했던 것처럼 강력하게 죄에 대하여 말하지 못했다. 요한의 다음과 같은 선언을 들어보라.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요한일서 3:8. 하나님께 불순종하기로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동안에도 그 분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신다고 믿는 어리석음은 전혀 성경에 의해서 뒷받침 할 수 없는 가르침이다.

복음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인데, 그분의 능력은 우리를 어떤 특정한 죄 뿐만 아니라, 모든 죄로부터 구원해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다음, 우리를 계속되는 죄의 세력 아래에 그대로 남겨두기를 원하신다고 믿는가? 만일 그대가 그렇게 믿는다면, 그대는 하나님을 죄에 대하여 우리의 공범자로 만드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건져주시며 구원하실 수 있다.

제4부 : 하나님의 심판


이제, 심판은 우리의 행함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대해서 공부해 보도록 하자. 물론, 이러한 말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율법주의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점에 있어서 너무나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요한은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 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요한계시록 20:12~13.

어떻게 우리가 이 말씀을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있는가? 행위가 심판의 기초가 된다는 말은 성경적 칭의와 상반되는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만일 우리가 어떻게 해서 행위가 심판 받게 되는지를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행위로 심판 받는다는 말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행위를 어떻게 시험하시고, 어떻게 측정하실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거절되거나 가납 받도록 만드는가? 사람들이 행한 행위의 양인가?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몫을 위해서 충분하게 옳은 일을 한다면, 우리는 하늘 진주 성문을 들어갈 수 있는가? 그리고 행함이 부족한 자들은 성밖에 남겨짐을 당하게 될 것인가?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는 하늘 왕국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는 일단의 무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2~23.

이 말씀 중에서 마지막에 나오는 말씀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보자. 예수께서는 그들 자신들이 행했던 행적의 진실성 여부에 대해서 부인하거나 책망하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자신들이 했던 수많은 행위에 대해서 길게 늘어놓았다. 행위의 양에 있어서는 조금의 부족도 없었다. 행위의 양은 인정되었지만, 분명한 사실은 행위의 양에 근거하여 심판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하늘에 들어가도록 허락 받지 못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들이 행하였던 행위의 종류들을 볼 때에 더욱 혼돈하게 된다. 그들은 많은 행위를 하였을 뿐 아니라 매우 놀라운 행위들을 하였기 때문이다. 행위의 양뿐만 아니라 질에 있어서도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아마,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교회를 짓는 데에 수백만 달러를 헌금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도 하늘 문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지 않았다. 이 성경절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처럼 보인다. 다음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엄숙한 명령이 그들에게 내려지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성경의 마지막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성경절을 읽으면, 모든 수수께끼가 한꺼번에 풀려나가서 한 곳에 집중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3장 15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라고 하셨다. 물론,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행위들을 기록하시며, 그것에 의해서 최후의 심판을 베푸실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 계속되는 말씀을 읽어보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하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요한계시록 3:15~16.

여기에 이 문제를 전체적으로 풀어 헤치는 비밀이 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최후의 심판 날에 심판 받게 될 것이지만, 우리의 행위의 무게나 높이에 의해서 심판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열에 의해서 받게 될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의 모든 순종은 하나님을 향하여 헌신과 사랑으로 불타는 마음으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 의해서 모든 동기가 벗겨질 것이며, 검토될 것이다. 인간의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불타는 사랑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한, 어떤 종류의 행위도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믿음과 행함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열쇠를 찾을 수 있다. 행위 전체가 가치 있는 것으로 판명되든지, 아니면 전혀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 앞으로 향기로운 향이 되어서 가납되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토해 내치실 만큼 혐오스러운 것이 된다.

모든 것은 동기에 달렸으며, 누가 그러한 행위를 하도록 힘을 주었는 가에 달려있다. 그러한 행위의 원동력이 하늘로부터 온 능력인가? 아니면 지옥으로부터 올라온 세력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인가? 육체의 행위는 자신을 구원하려는 인간의 노력이지만, 마음 속에 내재하시는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의 행위는 그와 정반대이다. 이러한 행위는 진짜 믿음과 사랑의 신임장을 가지고 있는 행위들로 판명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 이후부터 지금까지 시험 기준을 변경시키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그 때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종류의 순종을 요구하신다. 그 당시, 우리의 시조인 아담은 타락하지 않은 거룩한 본성에 의해서 순종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의 후손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법과 조화되지 못하는 타락한 본성을 유전으로 이어받았다.

그러나 마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기적과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를 통하여 우리는 새로운 마음을 가진 거듭난 피조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또한 한번은 부자 청년이 예수께 찾아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 대답하시길, 계명들을 지키라 (마태복음 19:17) 라고 말씀하셨다.

이 두 개의 성경절 사이에는 서로 상충되는 어떠한 것도 없다. 이 두 개의 성경절은 새로 태어나는 거듭남의 경험 없이 어떤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없으며, 고의적으로 계명을 어기어 불순종의 길을 걷는 어떤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 두 개의 성경절은 동일한 구원을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또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자원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계명을 순종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심이 되는 진리는 개심하여 거듭난 경험이 없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고의적으로 순종하기를 거절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행위가 중요하지 않거나 필요하지 않다는 거짓말에 대해서 귀를 막아라. 또한 계명을 지키는 것은 율법주의라는 기만을 경계하라.

그러나 그대의 그리스도인 생애에 열매를 맺게 하는 숨겨져 있는 뿌리인 마음과 동기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라. 만일 그대가 하나님의 법에 일치하는 생애를 산다면, 그대의 마음에는 놀라운 즐거움과 만족함으로 채워질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계속적인 연결이 지속될 것이다. 누가 그대를 율법주의자라고 정죄할 지라도, 마지막 심판 날에는 그대를 정죄한 그 사람이 스스로의 말에 의해서 정죄 받게 될 것이다. 사랑에서 기인한 그대의 행위는 율법주의와는 철저하게 반대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10. ❖

제5부 : 믿음과 순종에 대한 성경의 한 예증

1. 베데스다 연못가의 환자

예루살렘에 있는 양 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요한복음 5:2~3.


이 연못의 물은 때때로 움직였는데, 일반적으로 이러한 현상은 초자연적 능력의 결과로 받아들여졌으며, 누구든지 물이 요동한 직후에 이 물 속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는 그가 어떤 불치의 병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나음을 받는다고 믿었다. 수백명의 환자들이 그 곳을 방문했으나 물이 요동할 때에는 무리가 너무 많아서 자신들보다 약한 남자, 여자, 아이들을 발로 짓밟으면서 서로 앞을 다퉈 밀려 들어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모여 들었기 때문에 그 못에 가깝게 접근하기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비록 못 가까이에 갔을지라도 못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연못 바로 옆에서 죽어가는 사람들도 허다하였다. 그 곳에는 오두막이 세워져서 환자들이 낮의 뜨거움과 밤의 냉기에서 보호 받을 수 있도록 돼 있었다. 거기에는 날마다 고침을 받겠다는 헛된 소망을 안고 연못가에 기어와서 이 행각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루는 예수께서 홀로 걸으시다가 그 못에 이르셨다. 그는 불치의 환자들이 비참한 모습으로 연못이 요동치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치유력을 행사하셔서 그곳에 있는 모든 고통 당하는 자를 건강하게 하시기를 갈망하셨다. 그러나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사람들이 예배 드리기 위하여 성전에 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치료의 행위가 유대인들의 편견을 자극시켜서 당신의 사업에 장애를 일으킬 것을 아셨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한 사람의 가장 처참한 형편을 보았다. 그는 38년간을 속절 없는 앉은뱅이로 지내온 사람이었다. 그 당시에 불치의 질병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범한 죄의 결과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으로 간주되었다. 그 환자는 홀로 쓸쓸하게 누워서 자기는 하나님의 자비에서 끊겼다고 생각하면서 오래 동안 불행의 세월을 보내 왔다. 물이 요동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때에는 그의 무력함을 측은히 여기는 사람들이 그를 행각에까지 실어다 주곤 하였다.

그러나 그 꼭 혜택을 입어야 할 순간에 그를 도와서 물 속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물결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지만 못 안으로 결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보다 힘센 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앞서 뛰어들어가곤 하였다. 그는 이기적이며 광분하는 무리와 경쟁할 수 없었다. 그 한가지 목적을 위한 그의 집요한 노력과 근심과 계속적인 실망은 그의 남은 기력을 신속히 빼앗아가고 있었다.

그 병자는 자리에 누워서 때때로 그 못을 바라보려고 머리를 들곤 하였다. 바로 그 때에 한 부드럽고 연민 가득한 얼굴이 그를 굽어보면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고 묻는 말에 그의 온 주의가 끌렸다. 그의 마음 속에는 희망이 솟아났다.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는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

그러나 타오르던 용기는 곧 시들어졌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자주 그 못에 들어가려고 애썼던 가를 상기했다. 이제 그는 물이 다시 동할 때까지 살아 있을 가망조차도 거의 없었다. 그는 지쳐서 얼굴을 돌리고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라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이 환자에게 당신을 믿는 믿음을 활용하도록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는 단순히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고만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온 믿음을 다하여 그 말씀을 굳게 붙잡았다. 모든 신경과 근육이 새로운 생명으로 전율하고, 절던 그의 다리는 건강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가 의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자기의 뜻을 정하자 그의 모든 근육이 그의 의지에 응답하였다. 자기의 다리로 일어서면서 그는 자기가 활동적인 사람이 되어 있음을 느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아무런 보증도 그에게 미리 주지 않으셨다. 그 사람은 멈추어 의심하여 그가 나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었으며 그 말씀에 입각하여 행동하자 힘을 얻었다.

우리도 이와 같은 믿음을 통하여 영적인 치유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되어왔다. 우리의 영혼은 마비되어 있다. 그 쇠잔한 사람이 걸을 수 없었던 것과 같이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와 유혹을 이기는 거룩한 생애를 살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무력함을 깨닫고 그들을 하나님과 조화되게 만들 영적 생명을 갈급 한다. 그것을 얻기 위해 그들은 헛되이 분투한다. 그들은 절망 가운데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 7:24)고 부르짖는다. 이러한 낙심하고 몸부림치는 자들은 위를 쳐다보라.

구주께서는 자기의 피로 사신 자들을 굽어보시고 말할 수 없는 연민과 긍휼로 네가 낫고자 하느냐 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그대에게 건강과 평안 가운데서 일어서라고 명하신다. 그대가 완쾌됐다고 느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단순히 그의 말씀을 믿으라. 그리하면 그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대의 의지를 그리스도의 편에 두라. 그분을 섬기고자 뜻을 세우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행동할 때에 그대는 힘을 얻을 것이다.

오랜 방종을 통하여 영육을 속박한 악한 행습과 강력한 정욕일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능히 거기에서 구출하실 수 있으며 또한 구출하시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는 죄로 죽었던 (엡 2:1) 영혼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실 것이다. 그는 연약과 불행과 죄의 사슬에 매인 포로들을 해방시켜 주실 것이다.

2. 갈등하는 그리스도인의 질문

저는 요즘에 매우 깊은 늪에 빠져 있습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육신이 약해서 자꾸만 세상의 유혹에 빠져서 죄를 짓게 됩니다. 결심하고 또 결심하지만, 나를 붙잡고 있는 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의 신앙 생애에 있어서 무엇이 문제인가요?

모든 사람은 이기적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우리가 유전적으로 물려 받은 죗되고 이기적인 본성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 수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을 볼 수도 없느니라 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십자가의 사랑을 이해한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소원으로 마음이 가득 채워지게 되는데, 이것이 거듭남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아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마음의 동기와 목적과 품성이 변화되게 된다. 악을 좋아하던 내가 선한 것을 사모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게 된다. 모든 동기와 목적이 악에서 선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러한 변화가 마음의 중심에 생긴 사람에게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애가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거듭남의 경험 없이 신앙 생애를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영의 일을 감당할 수 없다. 거듭남이 없이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은 있어도 선을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늑대가 양의 흉내를 내려고 애쓰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늑대가 양의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만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로운 생애를 살 수 있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 생활은 인간적인 노력과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으로 시작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십자가를 바라보자. 그리고 그분의 사랑에 귀하의 마음과 생애 전체를 바치면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귀하의 마음과 생애를 지배하시고 인도하시게 될 것이다. ❖

posted by Jangjaedang